동행(同行)

(퍼온글)

[이사갈때 복비 싸게 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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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이 낸 복비를 지적과에서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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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부동산에서 싸울 필요없습니다.

이걸 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사할때 복비를 적게는 10만원에서 몇십만원까지 더 내고 있습니다.

참고로 월세는 복비가 전세보다 훨씬 쌉니다.

1000/60 으로 1년 계약했다면, 1000+ (60*12(계약월수)) 으로 전세가 1720만원에 대한 복비를 지급하면됩니다.

5천만원이하 법정수수료율이 0.5%이므로

8만6천원 복비만 주면 됩니다. 대부분 복덕방은 월세를 전세가로 처리합니다만..

전부 다 사기입니다.

지적과에 문의해보시면 차액 다 돌려받습니다.

- 5천만원미만 / 수수료율(0.5%) / 최대(20만원)

- 5천만원이상 1억원미만 / 수수료율(0.4%) / 최대(30만원)

- 1억원이상 3억원미만 / 수수료율(0.3%) / 최대한도액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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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과에 신고하면 그 해당 부동산은 6개월간 영업정지 먹습니다. 엄청난 페널티죠.
하지만 사람들이 제가 쓴 내용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 위험을 감수하고 더 비싸게 받습니다.
일반인들은 모르니깐 괜찮다라는 아주 못된 심보이죠.

저는 복비를 절대 먼저 물어보지 않습니다. (중요함)
복비 계산할때 해당 계약에 맞는 금액 드리고 갑니다.
그러면 이거 모자르는데요 어쩌구 하면서 지랄크리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행동 수칙. 맘에 드는거 골라서 하세요.

1. 제동생이 어디구청 지적과 근무합니다.
2. 지적과에 문의전화 한번 해봐도 될까요?
3. 저번 이사할때 지적과에서 돈 돌려받았었는데... (혼잣말로)
4. 그냥 다 주고 영수증을 꼭 받습니다. (또는 현금으로 주지 마시고-"중요" 계좌 이체한뒤 이체 증거를 챙깁니다.)
그리고 지적과에 갑니다. 그리고 전화 한통화.."사장님 여기 지적과인데요.. 여기서 받을까요.. 계좌불러드릴테니 차액 돌려주실래요?"

알뜰하게 살아요.

Posted by CU@THETOP
[펌] 2003년 1월 월간중앙


한국대학 3대 名門― 서울대·고려대·연세대 기질 비교
권력지향 서울대,집단지향 고려대, 개인지향 연세대



연세대 출신은 왜 정치를 안 할까. 아니 좀더 정확하게, 왜 연세대 출신 국회의원은 별로 없을까-.

당초 이 기사는 이처럼 피상적인 질문에서 출발했다. 연세대 출신이 전혀 정치를 안 한다거나 국회의원이 전무(全無)하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다만 언필칭 우리 사회에서 명문대 혹은 일류대로 일컬어지는 3개교, 곧 서울대·고려대·연세대를 비교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상대적으로 연세대 출신 정치인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것도 다른 두 학교 출신 정치인에 비해 무척 적어 보인다는 의미다. 기자는 우선 피상적으로 던진 그 질문이 타당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실제로 연세대 출신 국회의원이 얼마나 되는지 현재의 16대 국회에서부터 따져봤다.

그 숫자는 얼추 앞의 ‘질문’내용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273명의 전체 국회의원 가운데 연세대 출신은 17명, 6.2% 정도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서울대는 104명으로 무려 38.1%, 고려대만 해도 35명으로 13% 가까운 의석을 차지(?)했다. 3개교 출신 국회의원 수를 비교했을 때 단연(?) 연세대 출신이 적은 것이다.

img2R기자는 거듭 14대와 15대 국회에 대해서도 3개교 출신 국회의원 수를 세었다. 결과는 ‘연세대 출신 국회의원이 역시 적다’는 현상을 거듭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15대 299명의 국회의원 중에서도 서울대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은 117명(39%), 고려대 출신이 그 다음으로 39명(13%)이었던 반면 연세대 출신은 15명으로 5%에 그쳤다. 14대 때도 그 같은 분포도는 다르지 않았다.

전체 299명 중 서울대 출신 국회의원은 94명(31.4%)이고 고려대 출신이 37명(12.4%)인데 비해 연세대 출신은 18명으로 6%였다. 우스갯소리로 만약 서울대당·고려대당·연세대당을 결성한다고 했을 때 연세대 출신은 아예 원내교섭단체 구성 요건을, 그것도 14, 15, 16대 내리 3대 국회에 걸쳐 갖추지 못했을 정도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면서 궁금증은 자연스럽게 연세대의 기질은 어떤 것인가 쪽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SKY, 곧 서울대·고려대·연세대 3개교의 기질 비교로 커졌다. 지금까지 이들 3개교의 기질에 대한 얘기들은 그야말로 구전설화(口傳說話)로만 전해져 왔다. 이 기사는 그것을 ‘문자화’해 보려는 첫 시도다.

초·중·고 학생을 둔 가정에서, 학생 자신이든 학부모든 이들 대학을 한 번이라도 머릿속에 그려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회에서 생업을 꾸려갈 때도 이들 3개교 출신과 싫든 좋든 인연을 맺지 않고 생활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인구에 비해 그 수는 적지만 ‘스카이’ 혹은 ‘스카이 출신’은 사람들의 관념 속에, 또 실제로 우리 사회 어디나 존재하면서 개인·조직·사회에 음으로 양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집단이다.

이런 배경에 비추어 기자는 이 기사가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세 가지쯤의 효용을 가질 것으로 기대한다. 하나는 지금까지 말로만 떠돌던 SKY 기질에 관한 얘기들을 어떻게든 사회·문화적인 비교 탐색을 통해 좀더 구체적, 현실적인 수준으로 정리했다는 점이다.

또 그것을 통해 허다한 (예비)입시생들과 그 가족에게, 엄연히 존재하면서도 지금까지 각 대학의 안내서에는 전혀 나온 적이 없는 SKY(출신)의 기질이 어떤 것인지 희미한 정보를 줄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나아가 사회 각계각층에서 생업을 꾸려가며 싫든 좋든 SKY 출신과 이래저래 대면(對面)하지 않을 수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SKY 출신 ‘인사’들의 기질에 관한 일말의 정보를 제공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3개교 각각의 기질은 어떤 것인가. 물론 그것을 가로 세로 금을 딱딱 그어가며 잘라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3개교와 그 구성원, 그리고 그 졸업생들에게는 저마다의 독특한 집단기질이 존재하는 것으로 대다수 사람들은 인식하고 있다. 먼저 SKY라는 집단의 ‘크기’부터 얘기를 시작하자.

精銳 70만

이들 3개교는 지난 100여 년 동안 모두 70여 만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왔다. 뒷단위들을 빼고 2001년까지 서울대가 26만명, 고려대가 21만명, 연세대가 23만명이다. 5,000만명에 육박하는 우리 인구 중 70만명이라면 별것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70만’이 아니다.

명실공히 한국의 정예(精銳)다. 우리 사회의 상층부에 포진해 국가의 정치·경제 ·사회·문화를 이끌어 왔고 지금도 이끌고 있는 엘리트집단이다. 그들을 왜 엘리트라고 부르는지 기자는 뒤에 각종 수치를 바탕으로 상술(詳述)할 것이다.

SKY의 기질 탐색에 들어가기 전에 독자들이 감안해 주셔야 할 것이 있다. 이것은 이 주제에 대한 탐색이 어떤 수학적 계산과 근거에 따른 ‘계량적’(計量的)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 관념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서울대 출신은 이렇고 고려대 출신은 저렇다, 또 연세대 출신은 이거다 하는 식으로 딱부러지게 그 특성을 단정짓기는 어렵다. 또 그 학교를 나온 사람은 예외없이 모두 그렇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개개인의 특성과 각 학교의 집단적 특성 혹은 집단적 기질이 합치하지 않고 어긋나는 경우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SKY는 과연 어떤 특성과 기질을 갖고 있는가. 그들은 어떻게 같고 무엇이 다른가. 먼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들 각 학교의 기질을 잘 알 것으로 여겨지는 해당 졸업생들의 견해부터 죽 모아 보는 것으로 얘기를 시작한다. 82학번으로 1986년 서울대를 졸업한 이창현(신문학) 국민대 교수의 심플한 3개교 비교.

“서울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자기중심적이다, 엘리트 지향성이 강하다, 엑스클루시브(exclusive)한 선민(選民)의식 같은 것이 있다, 상대적으로 다른 대학 출신들보다 폐쇄적이다, 대중정서와 좀 떨어져 있다 같은 것들입니다.

연세대는 독수리가 우선 떠오르는데, 그것이 미국의 국조(國鳥)이기도 하지만 다분히 서구적이다, 리버럴하다, 그러면서 얄팍하고 가볍다 뭐 그런 이미지고요. 고려대는 반면 어떤 전통적 측면이 강하고 우직하다, 신파극(新派劇) 같다, 깡패 근성이 있다, 대단히 서로 집착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외형만 봐서는 조폭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거예요. 실제로 그만큼 결속력이 강하니까요.”

이교수는 어디서 그런 차이들이 생겨났다고 보고 있을까.

“고려대생이나 고려대 출신부터 보면 우선 그들은 내부적으로, 스스로 집단의식을 강화해야 생존할 수 있다, 그런 데서 기질이 형성된 것 아닌가 싶어요. 제가 실제로 통계는 뽑아 보지 않았지만 고려대는 지방 출신 학생이, 특히 호남쪽 연원(고려대 발전의 기틀을 닦은 인촌 김성수가 고창 출신임을 의식한 듯)을 갖고 있다, 그런 이미지가 있잖습니까. 또 학생들은 서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 단계 아래 석차’로 구성됐다는 무의식도 있을 테고요. 그런 무의식들이 작용해 ‘우리는 뭉쳐야 한다’는 어떤 집단 무의식이 기질로 승화된 것 아니냐,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서울대는 본래 관립(官立)으로 출발해 민중지향성이라기보다 고급 지배집단을 만들어내는 성격이 강했고, ‘석차로 1등’을 선발해 충원했어요. 그들은 안 그래도 일찍이 초·중·고 시절부터 ‘1등 의식’을 갖고, 또 주변에서도 그런 시각으로 그들을 대하던 환경에서 성장해온 캐릭터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였으니 다른 어떤 집단보다 ‘우리가 최고’라는 무의식과 ‘계속 최고여야 한다’는 권력·지배 의지가 심어졌을 겁니다.

연세대는 설립자도 외국인 선교사들이고 시간이 갈수록 신촌문화, 좀더 젊고 개방적인 문화와 어우러지면서 분위기가 형성돼 나갔다고 볼 수 있겠죠.
여학생 수도 각 학교에 영향을 주는 요소였던 것 같습니다. 서울대와 고려대는 여학생이 좀 적었고 연세대는 상대적으로 많았잖아요? 남성은 아무래도 권위, 전통 같은 이미지쪽이고 여학생의 경우 개방, 탈권위, 국제화쪽이라고 볼 수 있죠.”

3개교의 뚜렷한 차이에 대해서는 “그들이 내뿜는 힘(力)이 다르다”고 말한다.

책·막걸리·구두

“연세대는 개인의 매력, 고려대는 집단의 힘, 서울대는 제도화된 권력이라고 봐요. 또 연고대는 감성지수(EQ)가 강한 편이죠. 사람과 사람이 서로 부대끼면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관계를 맺고 거기서 감성지수가 높아지거든요. 반면 서울대는 역시 IQ(지능지수)예요. 제가 학교에 다니는 동안 줄곧 느꼈던 분위기가 ‘아, 여기는 IQ 경연장 같다’는 것이었거든요. 고시를 통해 권력을 잡는다 해도 역시 관건은 IQ니까요.

거기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이 당장 사회에서의 관계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 선후배간 관계의 어떤 특수성입니다. 연고대는 단지 선배라는 이유만으로 후배를 심복(心服)시킬 수 있지만 서울대는 그것이 어렵죠. 아니, 솔직히 저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요.”

서울 이화동에 있던 ‘서울법대’ 68학번인 현 서울대총동창회 이세진 사무총장이 들려주는 SKY론, 특히 서울대론.

“지금까지도 유행하는 격언(?)이 그때도 있었어요. ‘100원이 생기면 서울대생은 책을 사 보고 고려대생은 막걸리를 사 먹고 연세대생은 구두를 닦는다’는 얘기죠. 서울대의 창학(創學) 정신은 학문, 곧 진리탐구예요. 진리에 대한 도전, 진리에 대한 실천, 그런 것이 은연중에 학생들의 사고에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물론 대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서울대는 그것이 대단히 강하다, 그렇게 봐요. 연세대는 아무래도 고려대나 서울대보다 리버럴해요. 기독교 재단이고 외국계 재단이라서 그럴 수 있을 겁니다. 고려대는 거기에 비해 좀더 보수적, 뭐랄까 전체주의적(웃음)이랄까, 그런 분위기고요.”

그는 뜻밖에 기자가 맨 처음 생각했던 질문, 곧 ‘연세대생은 왜 정치를 안 할까’에 대해, 기자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얘기를 꺼냈다.

“내가 오랜 시간 가만히 봐오니 연세대 출신들은 정계나 관계로 진출을 잘 안 해요. 서울대나 고려대는 상대적으로 연세대보다 많이 진출하는데 말이죠. 능력면에서 다른 두 학교와 비교해도 연세대 출신이 뒤떨어지거나 못할 게 없잖아요? 그런데 그걸 잘 안 해요. 그 이유를 내가 곰곰이 따져봤는데…. 정치라는 것이 결국 사람과의 관계, 어떤 네트워킹, 사람을 동원하고 뭐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연세대 출신들은 그런 것에 별로 메리트를 못 느끼는 것 같아요. 권력지향성도 상대적으로 적고…. 대신 자유롭게 내 사업, 내 일을 즐기는 스타일이라. 나는 그것을 연세대 출신의 안분자족(安分自足)이다, 그렇게 표현하고 싶네요.”

세 학교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학교가 지향하는 이념도 중요하지만 우선 어떤 학생들이 그 학교에 많이 가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면서 이총장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애당초 각 학교에 들어가는 학생들이 전에는 달랐던 것 같아요. 연세대에 지원하는 학생들은 가정적으로 뭐랄까, 좀 중산층 이상이라고 봐요. 상대나 의대를 제일 쳐줬는데, 그게 가정적으로 안정된 학생들이 많지 않았나 싶고. 고려대는 법대가 강했던 것 같은데 거기 촌사람들이 많았을 거예요. 그래도 서울대보다는 좀더 형편이 나은 학생들, 시골에서도 서울대 지원자들보다 좀더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갔을 거예요. 아무래도 돈이 드는 사학(私學)이니까. 서울대는 나도 촌(부산)에서 올라왔지만 대부분 쫄쫄 가난한 수재들이 많았죠. 그때는 중학부터 입시를 거쳐 올라왔으니 어릴 때부터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꿈꾸는 것이, 지원하려는 대학이 애당초 달랐어요. 또 성적이 그렇게 일찍부터 서열화돼서 자기가 지원하려는 목표 대학이 뚜렷할 수 있었고요. 그러다 보니 서울대는 (등록금이) 싸서, 또 일단 들어오면 주변에 과외를 해가면서 독학할 수 있었으니까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지원했죠. 또 환경이 어렵다 보니 다른 학교 학생들보다 좀더 입신양명(立身揚名)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죠.”

그러면서 그는 ‘격세지감’도 덧붙였다.

“서울대 정운찬 총장이 새로 취임하고 점심식사를 하는데 ‘앞으로 전국에서 학생들을 뽑아야겠다’는 거예요. 지금은 과외들을 해서 가정적으로, 환경적으로 좀더 나은 서울의 강남이나 신도시 같은 데서 서울대에 주로 들어온다, 그러니 서울대가 ‘국민의 대학’인데 그렇게 편중되게 들어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얘기죠. 격세지감을 느꼈습니다.”

고려대로 넘어가 보자. 고려대생이나 고려대 출신의 기질에 대해서는 고려대 국문학과 56학번 ‘대선배’이자 현재 한양대 교수로 정년을 바라보는 박노준 교수가 여러 사람의 의견을 한데 모아놓은 듯 차분히 정리해 주었다. 그는 A4용지 두 장의 앞뒷면을 빼곡이 채운 메모를 들고 고려대에 대해 이렇게 ‘종합’했다.

“한 40년을 학교에 있으면서 가만히 보니 SKY 3개 대학의 가장 큰 차이는 ‘집합성’ 같아요. 서울대는 집합성이 없어요. 고연대는 있고(대학에 들어간 이후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박교수는 고려대 출신답게 ‘연고대’가 아닌 ‘고연대’를 고집한다) 그 중에서도 고려대가 집합성이 가장 강해. 내가 고려대를 나왔으니 고려대 얘기를 좀 할게요. 고려대 기질을 나타내는 키워드를 나는 일곱 가지로 뽑아 봤어요. ▷민족대학 ▷지성과 야성 ▷말 그대로 교우(校友) 간의 단합 ▷촌스러움과 투박함 ▷성실 ▷추진력 ▷막걸리죠. 그런 키워드에 어울리게 고려대는 생각과 행동의 선이 굵습니다. 크게 생각하고 행동하죠. 포용력도 대단히 뛰어납니다. 그래서 고려대생의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 바로 ‘극단적 파국을 기피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시대를 넘어 변하지 않는 고려대의 원형질(原形質)이라고 봐요. 1950년대에 학교에 들어오니 본관 앞에 현수막이 탁 붙어 있는데 구호가 뭔고 하니 ‘행동하는 고려대에서 사색하는 고려대로’야. 그러니 참 얼마나 고려대가 액티브한 학교인지 알 수 있잖아요? 그것이 나중에 1970년대 김상협 총장 오시면서 ‘지성과 야성’으로 바뀌었어요. 그게 지성뿐만 아니라 야성도 좀 갖추자는 게 아니라, ‘이제 야성을 좀 죽이고 지성도 좀 갖자’는 거라. 그게 바로 고려대의 전통이고 본능 아니겠어요?”

이번에는 고려대 신문인 ‘교우회보’ 편집국장을 지낸 H교수의 견해.

“사실 ‘고려대스럽다’거나 ‘연세대스럽다’는 것은 머리에 쉽게 탁 떠올라요. 그런데 ‘서울대스럽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저는 탁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마 사학으로서의 고려대나 연세대는 자발적으로,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주체적으로 움직이면서 보이지 않는 그 뭔가를 형성하고 또 액션이 이뤄지면서 그런 기질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고 봅니다. 반면 관(官)이 설립을 주도하고 학교도 운영해 오고 또 전체 단위가 아니라 단과대별로 성장해온 서울대는 상대적으로 그런 기질이 자연발생하기 어렵지 않았나 싶거든요.”

3개교 병원 영안실도 달라

그러면 ‘고려대스럽다’ ‘연세대스럽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H교수는 다른 이들과는 다른, 독특한 얘기를 꺼내 답변했다.

“사람의 생로병사(生老病死)에 대한 시각조차 다른 게 아닌가, 좀 엉뚱하게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제 집사람이 큰아이는 고려대병원에서, 작은아이는 세브란스병원에서 낳았거든요. 그때 그러더라고요. ‘세브란스쪽이 고려대병원보다 한결 차분하고 깔끔하고 안정돼 있는 것 같다’고요. 그것을 생명이 태어나는 분위기라고 한다면 생명이 떠나가는 분위기도 있지 않겠어요? 영안실 말입니다.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은 잘 아시죠? 문상을 가도 술 한잔 걸치고 앉아 고스톱치고 할 공간이 없어요. 문상만 깔끔하게 하고 식권(食券) 받아 식사하러 가도록 돼 있잖습니까. 고려대는 전혀 달라요. 고려대병원 영안실은 최근에 새로 지은 최첨단형인데도 문상도 하고 조문객들이 둘러앉아 술도 마시고 고스톱도 치고 하는 전통적 분위기의 공간이 널찍하게 마련돼 있어요. 그렇게 달라요.”

서울대의 특징, 기질은 그 뒤에 이어진다.

“군생활을 사관학교 교수요원으로 했거든요. 아마 서울대 출신이 전체의 절반 정도였죠? 다수가 서울대 출신이고, 그 다음 고연대 출신들이고 그래요. 이래저래 학번으로 따져 3개 대학 선후배들이 다 같이 생활하게 됩니다. 거기서 흥미로운 것은 고려대는 고려대 선·후배 간에, 연세대는 연세대 선·후배 간에 형 아우 하거든요. 또 고려대와 연세대 사이도 친해서 쉽게 그런 관계와 호칭으로 터놓고 지내고요. 고연대와 서울대 간에도 그런 관계는 흔해요. 그런데 딱 한 가지, 같은 학교 출신끼리도 형 아우가 아니라 군대 계급으로, 공식적인 관계로 지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서울대 출신들이에요. 여간해서는 그런 사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공식적인 계급으로 지내는 거예요. 아, 저런 것이 바로 대학의 기질이나 문화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죠.”

그는 “과연 해방후 ‘국립서울대’ 출신들이 일제시대의 ‘경성제대’ 출신을 선배로 볼 것인가” 물으면서 “서울대는 어떤 단일학교로서의 전통성보다 역시 단과대의 전통이 중시되는 것 같고, 더욱이 ‘똑똑함’이 최고의 덕목인만큼 선후배 관계랄까 ‘피의 정통성’ 같은 의식은 희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면서 H교수는 “장인어른이 서울대 출신이신데, 집사람이 ‘서울대 출신과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해서 저와 결혼했다”며 웃는다. 그 대목은 앞서 서울대총동창회 이세진 사무총장의 얘기와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 이총장 역시 “우리 딸들은 서울대 출신은 재미없다며 서울대 출신과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고 했다. 어떻게 재미없다는 것일까. H교수의 개인담.

“연애 때부터 장인을 보면 모든 것이 원리원칙이고 남한테 예의상 말고는 머리를 수그리는 법이 별로 없으세요. 깐깐하시죠. 술을 드셔도 과음하는 법이 절대 없고, 식사를 해도 과식이 없으세요. 하루 일과, 즉 기상시간·식사시간·취침시간 같은 것이 칼같이 일정합니다. 별로 파격이 없고, 뭐랄까…. 탁 터놓고 서로 엉킬 수 있는 인간적 매력 같은 것이 좀 적죠.”

고려대는 어떨까.

“이런 얘기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몇 년 전에 김덕룡 의원과 교우회에서 식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양반이 서울대를 나오고 나중에 이쪽에서 대학원을 했죠. 그 인연으로 고려대 교우회에 자주 나오거든요. 그분이 그래요. ‘이렇게 사람 냄새가 물씬한 데를 찾아보기 어려워서 내가 이쪽 교우회를 자꾸 찾게 된다’는 거였죠. 고려대는 한 마디로 사람 냄새가 나고 우직하죠. 술집에서 고려대 얘기를 떠들다 보면 옆에 앉아 있던 나이 드신 어른이 슬그머니 일어나 술값을 내주는데 ‘내가 니들 선배’라는 거예요. 고려대 출신이라면 그런 경험 한두 번쯤은 갖고 있을 겁니다. 서울대가 그러겠어요, 연세대가 그러겠어요? 전에 일본에서 다른 사람 대신 목숨을 버린 이수현이나 얼마 전에 소매치기를 쫓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그 친구 둘 다 고려대 출신인데, 나는 그것이 우연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무의식에 고려대 기질이 들어 있다고 봐요. 그것은 불의를 보면 일단 덤벼드는 정의감,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존심이랄까 결속력이죠. 똑같이 옷을 입고 술을 먹어도 그가 고려대생인지 아닌지는 교가(校歌) 부를 때 알아요. 연세대생이나 서울대생은 제가 장담컨대 자기 학교 교가 끝까지 아는 사람 드물 걸요? 고려대생은 교가 다 알아요. 고려대생은 설사 체육경기 같은 데서 진다고 해도 끝까지 교가 다 불러요. 독특하죠.”

포장마차에서의 육박전, 그러나…

몇 년 전 기자가 ‘월간중앙’ K부장과 밤늦게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다 다른 술패와 싸움이 붙었던 일이 생각난다. 양쪽 다 벌겋게 취한 상황에서 시비가 붙어 주먹질로까지 발전했는데, 잠시후 알고 보니 저쪽이 고려대 출신들로 K부장의 대학 후배들이었다. 이후 상황은? 볼 것도 없었다.

그쪽이 깍듯하게 K부장에게 ‘형님’ 하면서 그 포장마차의 술을 거의 다 마셔버리는 상황으로 전환됐으니까. 술값은? 물론 K부장이 쐈다. 그 전말을 보면서 연세대 출신인 기자는 속으로 ‘내가 저런 상황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 같은 ‘기질’이 형성되는 원인에 대해 H교수는 학교의 설립 정신과 선후배 전통을 든다.

“그런 기질이라는 것이 그 학교의 눈에 보이는 제도나 커리큘럼에 의해 생기고 길러지는 것은 아니겠죠. 커리큘럼 이외의 시간과 상황들, 학과와 동아리, 출신 고교 인맥 등이 종횡으로 얽히고 설키면서 상승효과를 일으키고 서서히 어떤 기질을 몸에 배게 하는 것이겠죠. 고려대는 ‘민족’의 이름 아래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사람의 용광로’라는 생각을 합니다. 배타적이지 않아요. 설립 정신이 그렇잖아요? 다른 학교 출신 교수님들도 고려대에 오면 곧 고려대인으로 동화됩니다. 또 전 세계에서 고려대만큼 ‘야성’(wildness)의 색채가 강한 대학도 드물 겁니다. 앞에서 세워진 그런 전통이 선후배 관계를 통해 죽 대물림하는 거죠.”

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연세대를 빼놓을 수 없다. 재학 시절 ‘연세춘추’ 편집장을 지내고 오랫동안 대중문화쪽을 연구해온 신문방송학과 강상현 교수의 견해.

“서울대다, 연세대다, 고려대다 하는 기질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어떤 정형화된 공통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을 겁니다. 그것을 다시 일일이 말하는 것보다 나는 서울대를 상징하는 키워드를 엑설런스(excel lence), 고려대의 키워드를 커뮤니티(community)라고 봐요. 연세대는 프라이버시(privacy)입니다. 각기 뉘앙스가 있죠? 서울대는 남과의 비교에서 우수함, 톱(top)을 지향합니다. 그것은 곧 철저한 자기관리와 엄격한 자기절제, 비정할 만큼의 부단한 자기노력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 고려대는 다른 모든 가치를 ‘공동체’ 안에 녹여 버리는 기질이 있어요. 고려대가 내세우는 정의감이라는 것도 사실 공동체의 행복을 지향하는 것 아니겠어요? 반면 연세대는 철저하게 자기 본위, 이기적인 어떤 부정적 의미의 개인성향이 아니라 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프라이버시를 추구합니다. ‘나는 당신을 100% 인정한다, 당신의 생각과 당신의 행동을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니 당신도 나를 인정하고 나를 가만히 놔두라’는 의미에서의 프라이버시요, 자유죠. 서울대 출신도 개인주의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조직에서, 집단에서, 관계(關係)에서 위로 오르기 위한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연세대의 개인주의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자체에서 떨어져 나와 있는, 위로 오르려거나 뭐 그런 의식을 갖지 않는 순수한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비교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서울대는 청와대나 여의도(국회) 성향이고, 고려대는 시골 부락 성향, 연세대는 서울에서도 강남(江南) 성향이라고 갖다 붙일 수 있을 겁니다.”

비유를 들어 얘기하기를 좋아하는 강교수는 “서울대생은 모과, 연세대생은 양파, 고려대생은 딸기”라고도 했다. “서울대생은 겉으로 보나 까놓고 보나 딱딱하고 맛이 없다. 연세대생은 쉽게 껍질이 까지지만 까도 까도 그 속이 잘 나오지 않고 친해지기 힘들다. 고려대생은 껍질을 깔 필요도 없이 그냥 와락 씹으면 달다”는 비유다. 그는 특히 개인주의 성향, 속을 잘 드러내지 않고 사람들과의 관계보다 자신의 행복, 자신의 철학을 더 중시하는 것이 연세대 기질이라면서, 그 원인에 대해 이렇게 분석해 주었다.

서울대=모과·고려대=딸기·연세대=양파

“미국 선교회 재단이 설립한 연세대는 개방된 서구의 가치 가운데서도 특히 ‘자유’라는 가치를 가장 많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방종과는 다르죠. 기독교적 절제, 기독교적 애타심에 바탕해 절제된 자유 의식입니다. 그 자유 의식, 자유 의지가 연세 100년을 지탱해온 중심 가치가 돼 왔습니다. 굳이 남의 위에 군림할 필요도 없고 내가 벌어 내가 행복하게 살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되는 서구적 개인주의, 서구적 자유 개념이죠. 졸업후 연세대 출신들이 개인적으로는 서로 다 같이 친하게 잘 지내면서도 연세대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뭉치는 행위는 잘 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그는 저 앞에서 이창현 교수가 잠깐 얘기했던 ‘여학생 요인’에 대해서도 의견을 내놓았다.

“서울대·연세대·고려대의 기질을 특징짓는 변수로 특히 여학생 요인이 나는 중요하다고 보는데, 사실 그런 점에서 연세대는 다른 대학보다 훨씬 ‘여성적’이었고 그만큼 남학생들도, 나아가 학교 기질 전체가 좀더 스마트하고 깔끔하고 세련되고 섬세한 쪽으로 발전하지 않았나 봅니다. 연세대는 일찌감치 의대로 시작했고 그에 이어 간호학부가 생기고 하면서, 또 기독교의 영향으로 국내 여성들에게는 다른 대학보다 훨씬 더 ‘여성에게 개방된 이미지’를 갖고 있었거든요. 그것이 여학생들을 앞서 끌어들이는 요인이 됐고, 시간이 지나고 여학생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그것이 학교 전체 분위기에 영향을 끼쳤다고 봐요.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남자들만 있는 곳(가령 박노준 교수가 1956년 고려대에 들어갈 때 750명의 신입생 가운데 여학생은 10명선이었다) 하고는 아무래도 분위기가 확 다르지 않겠어요?”

1963년 고려대 유진오 총장이 연세춘추 10주년을 맞아 연세춘추에 기고한 글에서 연·고대를 비교한 것을 되읽어 보는 것으로 일단 ‘졸업생들이 말하는 SKY’편을 접는다.
‘연세대와 고려대는 여러 가지 점에서 대조적으로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연세대는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임에 반해 고려대는 한국인의 손으로 세워진 학교다. 연세대는 기독교 정신을 교육의 기본으로 삼고 있는 데 반하여 고려대는 민족주의 내지는 유교 정신의 색채가 강하다. 연세대는 서울 시내의 서쪽에 위치해 있는 데 반하여 고려대는 동쪽에 위치해 있다. 연세대 학생은 스마트하고 하이컬러풍이 있는 데 반하여 고려대 학생은 좋게 말하면 실직(實直)하고 나쁘게 말하면 촌스럽다…. 연세대와 고려대는 확실히 서로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양교의 연혁·전통·경영자·학풍의 차이에서 오는 필연적 결과일 것이다.

하여간 나는 지난 30년 동안 양교 축구팀의 경기를 볼 때마다 양교의 차이를 느낀다. 연세대 선수들은 패스에 빠르고 적의 허를 찌르는 데 기민함에 반하여 고려대 선수들은 개인기나 적의 허를 찌르는 데는 둔한 대신, 완벽한 수비진을 치고 있는 적진에서 우격다짐으로 득점하는 거칠음(toughness)에 있어서 장점이 있는 것으로 언제나 느끼는 것이다. 양교의 연혁이나 학풍의 차이가 어떤 과정을 밟아서 이러한 데까지 미치는 것인지 신비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샌님·술꾼·제비

앞서 졸업생들의 얘기는 그동안 세상에서 SKY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던 이미지를 새삼 확인시키거나 SKY에 대해 새롭게 보게 하는 한 계기가 됐을 것이다. 기자는 졸업생들을 만나본 뒤 그들이 갖고 있는 관념이 과연 실제로 각 학교의 ‘현실’과 어떻게 서로 상관(相關)되고 있을까를 탐색해 보았다.

1982년, 기자가 연세대에 입학한 이후 근 1년여 동안 술자리 때마다 빼놓지 않고 불렀던 노래가 생각난다. 이 노래는 해당 SKY뿐만 아니라 다른 대학에까지도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 ‘영광 영광 할렐루야’라는 찬송가 곡에 가사만 바꿔 놓은 노래였다. 가사를 그대로 옮겨놓기가 민망할 정도다. 기사를 위해 ‘할 수 없이’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니 용서해 주시기 바란다.

‘관악골에 자리잡은 서울대학은 총장이 쪼다라서 교수도 쪼다, 교수가 쪼다라서 학생도 쪼다, 모두 다 쪼다, 쪼다 학교래’ ‘안암골에 자리잡은 고려대학은 총장이 술꾼이라 교수도 술꾼, 교수가 술꾼이라 학생도 술꾼, 모두 다 술꾼, 술꾼 학교래’ ‘신촌골에 자리잡은 연세대학은 총장이 제비라서 교수도 제비, 교수가 제비라서 학생도 제비, 모두 다 제비, 제비 학교래’ 하고는 후렴으로 ‘영광 영광 연세대학∼’ 하는 식이었다.

젓가락으로 술상을 두드려대며 꽥꽥 노래부르기 일쑤였는데 가사가 듣기 거북해서 그렇지 결코 다른 학교를 공격하거나 미워하거나 무시하거나 하는 악의(惡意)는 없었다. ‘역시 우리가 최고’라는 치기 어린 기승지심(氣勝之心)의 발로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 노래를 부르면서 사실 학생들은 자기 학교 말고 다른 두 학교에 대해 더더욱 친밀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각각 쪼다·술꾼·제비로 표현된 각교의 특성이다. 그 워딩(wording)의 중의(重義)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절묘하다 싶다.

서울대를 ‘쪼다’라고 한 것은 학생들이 공부벌레며 공부말고는 달리 하는 것이 없는 샌님임을 빗댄 것이었다. 고려대의 경우 “어디 고대만 술을 먹느냐”고 따지고 드는 분도 있겠지만 역시 다른 두 학교 학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술을 즐겨 마시고 그러면서 투박하고 거칠다는 이미지로 ‘술꾼’으로 표현됐을 것이다. 연세대는 외모에 신경 쓰고 행동거지가 남자답지 못하게 살랑거린다고 해서 ‘제비’다.

이것과 일맥상통하는 빗댐이 바로 앞에서 보았던 ‘책과 막걸리와 구두’다. ‘돈 100원이 생기면 서울대생은 책을 사고 고려대생은 막걸리를 마시고 연세대생은 구두를 닦는다’는 그 얘기다. “그것은 우리가 대학을 다니던 1960년대에도 유행하던 말”이라는 이세진 사무총장의 기억처럼 그 같은 이미지 설정은 대단히 일찍부터 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총장은 친절하게도 각교의 주종(酒種)에 대해서까지 의견을 내주었다.
“대학생들이 다 어렵던 시절이니 술을 마셔도 사실 소주나 막걸리를 많이 먹었죠. 그때만 해도 맥주는 학생 신분에 좀 비싼 술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미지는 또 그렇지 않아요. 서울대생은 학생 자신의 취향대로, 고려대는 막걸리, 연세대는 맥주라. 아닌게아니라 고려대 앞에는 걸쭉하고 질펀한 유명한 막걸리집들이 많았고 연세대앞 신촌시장 쪽으로는 맥주집들이 꽤 있었죠. 어쨌든 마시는 술도 그렇게 차이가 있다고 인식들을 했으니까….”

서울대 상징동물 鶴을 아시나요?

공부밖에 모르고 책에 머리를 묻은 샌님, 술에 절어 사는 술꾼, 구두 닦고 멋부리는 데만 신경쓰는 제비. 그런 반어적, 부정의 이미지를 긍정의 이미지로 휙 돌려놓고 보아도 세 학교의 특성은 그대로 이어진다. 당장 각 학교의 상징동물을 봐도 그렇다. 먼저 서울대는 학(鶴)이다. 까마귀들이 노는 곳에 어울려 물들지 않고 저만치 홀로 고고하게 서 있다. 술집을 순례하거나 연애하러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하며 도도하게 자기 갈 길을 간다. 누군가 그런 ‘학’에게 다가가려고 하면 휙 날아간다.

고려대는 잘 아시다시피 호랑이다. 한차례 어흥, 포효(咆哮)하고는 자기 영역을 ‘활보’한다. 거리낌없다. 눈치 보지 않는다. 마치 술 한잔 걸치고 거리를 호탕하게 걸어가는 협객이요, 건달(乾達) 같다. 남의 일이라도 불의를 보면 언제든 달려들 기세다.
연세대는 날카로운 눈의 독수리다.

끊임없이 자신과 주변을 관찰하면서 자기관리에 철저하다. 날고 싶으면 창공을 마음껏 날고, 날기 싫으면 안 난다. 한편으로 독수리는 미국의 국조(國鳥)다. 그것은 자유와 용기를 상징한다. 미국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웠다는 설립 배경과 함께 독수리는 연세대(생)의 자유로운 기질과 ‘열린 마음’을 상징한다.

학교의 색깔도 그렇다. 서울대는 흰색 또는 무색으로 표현된다(고려대 한승주 총장과 연세대 김우식 총장의 표현). 학(鶴)의 색깔이다. 무색, 무취, 무미다. 진지하고 담백하고 침착하다. 반면 냉정하고 재미없기도 하다. “우리 딸들은 서울대 출신하고는 결혼 안 한대”라면서 헛헛하게 웃는 서울대 출신 아버지들이 여럿 있다. “아버지같이 재미없는 사람은 싫다”고 딸들이 말한다는 것이다.

진리, 진리·자유, 진리·자유·정의

고려대는 호랑이 가죽 무늬의 빛깔, 이름하여 크림슨(자주색에 가까운 붉은색)이다. 빨간색보다 더 진한 느낌, 피가 막 터져나올 듯 강렬한 느낌을 주는 그 색깔이다. 그것은 열정, 그리고 그 말을 뒤집은 정열을 상징한다. 술을 많이 먹어 붉어진 얼굴빛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뜨거운 감정, 사람에 대한 열렬한 인정(人情)을 상징한다. 우유부단, 허여멀건한 것을 거부하는 화끈한 색깔이다.

연세대의 공식적인 색깔은 스카이블루(연한 청색)다. 말 그대로 밝고 연하다. 선선하고 쾌청한 느낌의 색깔이다. 열정은 빠져 있지만 편안하다. 독수리가 날아다니는 푸른 창공, 가장 맑은 날의 가을 하늘과 같은 색깔이다. 그 푸른 공간은 ‘독수리’의 자유지대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SKY 각 학교의 특성은 교훈(校訓)에도 그대로 반영돼 선명하게 비교된다. ‘책’을 사랑하는 서울대의 교훈은 ‘진리’ 한 단어다. 라틴어인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이라고 표기된다. 그뿐이다. 진리를 중시하고 탐구, 추구한다는 것에 학교의 이념이 집약돼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고 다만 ‘그 길’을 갈 뿐이다. 치열하게 진리를 추구하지만 반면 그렇게 하려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냉혹하고 비정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다. 그것을 추구하는 데 자기 자신의 변명이나 사정, 다른 사람들의 사정 같은 것을 일일이 생각해줄 여유가 없다. 이 대목에서 서울대생에게 가장 중시되는 인간능력의 척도는 지능지수(IQ, Intelligence Quotiency)다.

연세대의 교훈은 거기에 하나가 더 붙는다. 바로 ‘자유’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신약성경 로마서 1장8절이 그대로 교훈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그만큼 자유로워야 한다. 너무 진리에 얽매이지 말고 좀더 자유분방하게 살자는 얘기로 들린다. 기자는 연세대를 다니면서 실제 피부로 그런 자유를 느꼈다.

학교 안에서는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할 자유’와 ‘무엇이든 하지 않을 자유’가 터질 듯 팽배했다. 서로 남에게 신경쓰지 않는다. 서울대를 나온 기자의 한 친구(모 대학 교수)는 “서울대생들은 같은 과 학생들끼리도 경쟁심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연세대생들은 남이 뭘 잘 하든 신경도 안 쓰는 것 같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연세대생들은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용인하는, 이른바 ‘개방된 마인드’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의 일에는 좀처럼 개입하려고 하지 않는다. ‘너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인정한다. 그렇게 각자 알아서 즐겁게 지내자’는 쪽이다. 이 대목에서 연세대생들이 가장 중시하는 인간능력의 척도는, 굳이 말을 붙이자면 개방성(OQ, Openness Quotie ncy)이다.

고려대는? 진리와 자유를 인정하면서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얹어 놓았다. 바로 정의(正義)다. 그래서 ‘진리·자유·정의’다. ‘진리’는 뭐 따로 평가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무미건조하게 그냥 진리일 따름이지만, 정의는 다분히 감정(感情)과 평가(評價)가 들어간 말이다. 가령 ‘섹스’라고 하면 진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강간·간통으로 표현되면 그때부터는 정의(正義)냐 부정(不正)이냐의 영역으로 바뀌는 것과 같다. 좋다, 나쁘다 하는 인간의 감정과 평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전철에 뛰어들어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한 고 이수현이나 소매치기를 쫓아가다 교통사고로 숨진 전경이 모두 ‘고려대생’이라는 점은 그냥 보아넘길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런 고려대생들에게 중요한 인간평가의 척도는 감성지수(EO, Emotion Quotiency)다.

‘진리’가 가장 중요한 서울대에는 전통적으로 문리대와 법대가 역시 대표학부다. 또 실제로 문리대와 법대를 통해 서울대 졸업생들은 우리 사회의 상층부로 우루루 진출했다. 고려대는 어떤가. 고려대의 대표학부는 관계자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법대와 정치외교학과다. 사람 사이의 인정(人情), 사람 사이의 관계(關係)를 중시하는 고려대의 기질과 딱 맞아떨어진다. 연세대 역시 그 학풍·기질과 대표학부가 일치한다. 바로 의대와 상대다. 거칠게 말하면 의사가 좋고 사업가가 좋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내 독자적인 일을 하면서 자유롭게 먹고산다’는 전통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것 같다.

이들 3개교의 여기까지의 특징을 예화로 표현하면 좀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동네에서 큰 싸움이 났다. 서울대생은 집안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공부에 정신을 집중하다 보니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설사 큰소리가 난다 해도 꿈쩍 않고 앉아서 공부를 계속 한다. 연세대생은 공부하다 말고 밖으로 뛰어나간다.

나가서 보니 두 남자가 맞붙어 주먹질이다. 연세대생은 가만히 정황을 살피고는 그 가운데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쪽을 마음 속으로 비난한다. 그리고는 집으로 들어온다. 고려대생은? 마침 술을 한잔 걸치고 집으로 돌아오다 싸움 광경을 봤다. 얘기를 들어보니 한쪽이 잘못한 것이 분명하다. 고려대생은 가방을 옆에 놓고 ‘옳은 쪽’을 편들어 같이 싸운다.

술과 관련된 얘기를 한 가지만 더 하자. 앞에서 기자가 말한 친구 A교수가 기자에게 농반진반 던진 퀴즈다. 질문은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출신 3명이 술을 마신 뒤 술값을 누가 내겠는가’다. A교수의 자문자답.

“그게 처음하고 두번째하고 세번째가 있는데, 처음에는 고려대 출신이 내요. 왜냐? 다른 사람이 술값을 내려고 하면 ‘이건 도리가 아니다’라면서 자기가 ‘쏘겠다’고 막무가내로 계산하거든. 두번째 술자리에서는 서울대 출신이 낸다고. ‘전에 얻어 먹었으니 이번에 그것을 갚아야 한다’고 누가 계산하기도 전에 재빨리 계산하는 거지. 세번째 술자리에서는 누가 낼 것 같아? 서울대생이야. ‘그래도 역시 서울대 출신이 우리 사회의 톱이고 당연히 가장 잘 나갈 터이니’라는 얘기에서지. 연세대생은? 뭐 그렇게까지 자기가 원한다면, 하고는 기분좋게 고려대 친구나 서울대 친구가 술값을 내도록 양보하는 거라.”

A교수의 말처럼 서울대를 들어가는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동료들보다 성적에서 톱의 위치를 지켜온 이들이다. 그 자리는 높고 위대하지만 고독하고 힘들다. 그래서 제1인자의 자리는 늘 외롭다.

그 위치에 오르는 것도, 그 위치를 유지하는 것도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달렸다.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나 더 노력을 쏟고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주어진 임무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한눈을 팔지 말아야 한다. 흐트러진 길, 흐트러진 모습은 철저한 자제력으로 삼가야 한다. 일탈은 용납되지 않으며 원리원칙이 중요하다.

그런 그들에게는 자기 능력, 자기 의견, 자기 주장이 가장 중요하다. 본래 똑똑한 사람들끼리는 단합하지 못한다는 것이 동서고금의 진리다. 너도 나도 다 똑똑한데 단합이 잘 될 리 없다. ‘서울대 졸업생은 모래알’이라는 얘기도 여기서 나온다.

모래알, 젖은 모래알, 철근콘크리트

연세대생은 어떤가. 이세진 사무총장은 연세대 출신을 가리켜 ‘시멘트’라고 표현하지만 기자가 보기에는 ‘젖은 모래알’이다. 라이벌 고려대와 마주 서 있는 ‘사학(私學)의 한 명문’이라고 할 때는, 그래서 외부의 집단세력(?)인 고려대와 맞선 입장일 때는 역시 연세대쪽도 한 집단으로서 굳게 단합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연세대 출신들은 단단하게 모이지 않는다. 가슴에 깊은 정을 품고 남의 인생에 적극 개입하거나 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연세대의 이름 아래 단단하게 결속돼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거품’일 경우가 많다.
각교 동문회에서 발송하는 동문회보를 받아보는 졸업생 가운데 회비를 보내오는 비율(곧 회비납부율)을 봐도 그 같은 결속력의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2001년을 기준해 서울대총동창회는 모두 8만5,000명의 동문에게 동문회보를 발송했는데 그 가운데 회비를 보내온 졸업생은 2만명 가량으로 회비납부율이 23.5%다. 연세대는 8만명의 졸업생에게 동문회보를 발송한 뒤 1만5,000명 남짓 회비를 보내와 18.7%의 납부율을 기록했다. 반면 고려대의 경우는 5만여 명에게 회보를 발송, 그 대다수가 회비를 보내와 회비납부율이 90%를 넘어서는 ‘과연 고려대’로서의 결속력을 과시했다.

모래알 서울대, 젖은 모래알 연세대와 비교해 고밀도의 결속력을 자랑하는 고려대를 가리켜 사람들은 ‘철근콘크리트’라고 부른다.

각 학교의 성격은 동창회의 명칭에서도 드러날 정도다. 학교 동창회는 교명 뒤에 동창회 또는 동문회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서울대는 ‘동창회’ 앞에 ‘총’(總)이 붙어 ‘서울대총동창회’다. 단과대별로 따로따로 동창회가 운영돼오다 나중에 연합체로 합쳐진 까닭이다. 연세대는 그런 배경이나 동창회 명칭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범용(汎用)하게 ‘연세대동문회’다. 고려대는 그 이름에서도 동창들 간의 밀착감이 느껴진다. 동창회나 동문회가 아니라 ‘고대교우회(校友會)’다. 한 학교, 한 친구라는 뜻이다.

1997년 경제주간지인 ‘한경비즈니스’에서 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을 상대로 각 대학 졸업생들의 능력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역시 지금까지 논의한 얘기들과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그 설문조사의 결론을 줄여 보면 ‘▷서울대생은 기획력과 업무능력이 뛰어난 반면 단결·협동심이 부족하다 ▷연세대생은 진취적이고 창의성이 돋보이지만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 ▷고려대생은 업무 추진력과 특히 인화력이 두드러진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각 학교(출신)의 성격이 종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사람들과의 관계(關係)에서다. 현직 서울대 사회과학분야 C교수의 칼로 자르는 듯한 분석.

“사회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아니겠습니까. 또 거기서 각 개인의 기질이나 특성 같은 것들이 드러나는 것이고요. 거두절미하고, 서울대 출신들은 관계를 중시하지만 어떤 관계든 어떤 분야든 자신이 맨 앞이나 맨 위에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에요. 다른 사람 밑에 있거나 지는 것을 싫어하죠. 톱을 원해요. 설사 다른 사람의 밑에 있다고 해도 그것을 마음 속으로 잘 인정하지 않죠. 반면 고려대는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신경 쓰지 않고 관계 그 자체를 중시합니다. 관계가 허물어지거나 불편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연세대는 관계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이기적인 것은 아니고, 서구적 의미에서의 ‘개인주의’랄까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점이 희미하게도 아니고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연세대 출신은 왜 정치를 안 하나’라는, 맨 처음 질문은 여기서 대답을 유추해낼 수 있다. 정치는 어느 사회에서든 최고 엘리트 영역에 속한다. 사람들 간의 갈등을 조화시키고 자원을 배분하는 역할을 하면서 권력도 향유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고 엘리트 영역인만큼 최고 엘리트들이 몰리는데, 그런 점에서 서울대 출신들이 정치권에 대거 포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 정치의 기본은 뭐니뭐니 해도 사람과의 ‘관계’(關係)다. 정치는 관계에서 시작하고 관계에서 끝난다. 그런 인간관계에 강한 것은 역시 고려대 출신들이다. 따라서 고려대 출신들도 정치권으로 적극 달려든다. 그런데 연세대 출신은? 관계 자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터에 ‘관계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정치를 대단히 싫어할 수밖에 없다.

서울대 출신은 자기 입으로 출신 대학을 말하지 않는다
SKY라는 주제로 취재하는 동안 기자는 미리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3개교 출신간 행태 차이를 경험할 수 있었다. 하나는 서울대 출신들은 자기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가를 자기 이름으로 밝히는 법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연·고대 출신의 경우 자신이 연·고대를 나왔음을 농담으로라도 턱턱 화제로 삼는 반면 서울대생은 누가 따져 묻기 전에는 ‘남들이 알아주면 알아주었지 내 입으로 말하지는 않는다’는 일관된 태도였다. ‘서울대 나왔다고 재는 거냐’는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는 것인지 혹은 ‘내가 내 입으로 최고 대학을 나왔다고 얘기하는 것은 푼수 같은 짓’이라는 자의식이 있어서인지 모르겠다.

다른 하나는 만나고 헤어질 때의 태도였다. 특히 술을 먹고 헤어질 때 (독자 여러분도 그럴 기회가 있거든 한번 눈여겨 보시라) SKY 각 대학 출신들의 태도는 달랐다. 서울대는 작별인사를 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택시를 잡아타거나 자기 갈 길로 뚜벅뚜벅 간다. 연세대는 인사를 하고 먼저 가더라도 몇 번 뒤돌아 보며 손을 흔들어 친밀한 여운을 남긴다. 또는 다른 사람들을 먼저 택시에 태워 보내거나 배웅한다. 고려대생은? 쉽게 작별하려고 하지 않는다. ‘한잔 더’라거나 ‘너희들 먼저 가’다. 역시 고려대는 다른 대학들에 비해 감정적, 정의적(情誼的)이다.

그 같은 행태의 차이는 아예 술을 마시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사람의 본성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이 술에 취했을 때라고들 한다. 먼저 서울대생 혹은 서울대 출신들. 그들은 결코 취하지 않는다. 취하도록 마시지도 않는다. 필요에 따라, 자리에 따라 적당히 마신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도 많다.

연세대생이나 고려대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술을 적극적으로 찾아서 즐기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독자 여러분도 자신의 직장이나 주변에서 그런 음주 행태를 비교해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직접 ‘관찰’해 보시기 바란다. 취하도록 마셔야 할 때도 끊임없이 취하지 않기 위해(머리 속으로)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술에 있어서 서울대 출신들은 놀라운 자제력을 보인다. 술주정은 거의 없다.

연세대는? 술을 찾아 먹지는 않지만 일단 술자리에 들면 분위기에 맞춰 줄곧 마신다. 잘 취하지만 술주정은 별로 없다. 혹은 술에 취하지 않고도 취한 것처럼 즐겁게 논다. 술자리가 끝난 뒤 자신의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없나 꼼꼼히 뒤를 챙기는 것도 연세대 출신들의 특징이다. 술을 한번 진하게 마시면 며칠 동안 쉰다. 무리하지 않는다. 술 매너도 깔끔하다.

고려대생은? 이미 대답을 짐작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취한다. 취해버린다. 만취할 때가 많다. 화끈하다.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술자리 분위기, 아니 술을 마시는 것 자체를 주동(主動)한다. 술을 마신 뒤 거리낌없는 주정도 잦다. 그러다 보니 자기 몸에 지니고 있던 소소한 것들을 잃어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지리적 요인도 기질에 영향

학교가 놓인 위치도 각 학교의 기질에 영향을 주는 요소로 보인다. 단과대가 떨어져 일체감을 갖지 못했던 서울대는 1975년 이후 관악골로 모였다. 관악골은 서울의 도심은 물론 부도심에서도 뚝 떨어져 있다. 서울대 부근에서 가장 큰 건물은 서울대다. 다른 학교 학생들이나 인근 지역과 살을 맞댈 일이 없다. 학(鶴)처럼 저만치 뚝 떨어져 있다. 거대한 고시촌처럼 산기슭에 푹 파묻혀 자기들 일에만 몰두한다.

고려대가 자리잡은 안암골은 동쪽 부도심에 위치하지만 거기도 역시 고려대뿐이다. 더욱이 고려대 캠퍼스가 의대·공대·본관 등으로 크게 3분할되면서 안암동에서도 쑥 안쪽으로 학생들의 활동 중심지가 달라졌다. 그래서 정문 앞은 과거에 비해 무참하게 썰렁해졌다. 전에는 ‘마마집’으로 통칭되던 막걸리주점들이 자리를 틀고 고려대생들을 불러들여 북적거렸지만 지금은 썰렁하다. 외부인(다른 학교 학생들이나 지역민들)들과 어우러지는 대신 고려대생끼리 어울리며 완고하게 자기 학교 기질을 고수해 나가는 지리(地理)다.

두 학교에 비해 연세대는 사통팔달 뻥뻥 열리고 통한다. 연세대생들의 중심 활동지인 신촌 로터리는 서울의 부도심 가운데 가장 번화한 한 곳이 됐다. 서강대·이화여대·명지대·홍익대·추계예술대가 만나는 교차점이다. 게다가 인근 고교생과 중학생들까지 몰려들어 주말이면 걸어다니기가 힘들 정도다. 그곳은 열린 공간이고, 다른 두 학교의 ‘방과 후 문화’와 비교하면 한결 젊고 요란한 문화다. 가뜩이나 자유롭고 개방된 분위기의 연세대생 기질은 신촌문화와 상승(相乘)작용을 일으키며 공고화될 수밖에 없다.

“사회적 물의가 일어날까 두렵다”면서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연세대의 한 교수는 “그 같은 각교의 기질이 이성교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같은 캠퍼스 커플이라고 해도 서울대생은 상대를 그야말로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따져 사귀는 것 같아요. 남자쪽이든 여자쪽이든 신중하죠. 사귀기는 해도 몸가짐, 마음가짐을 조심하고 결혼까지 이르는 과정도 대단히 뭐랄까, 깐깐한 것 같아요. 고려대는 커플이라기보다 ‘동지’쪽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서로 흉허물 없이, 격의 없이 상대의 조건이나 배경을 따지지 않고 뜻만 맞으면 어울려 다니는 거죠. 또 캠퍼스 커플이라고 해도 단둘이 끼리끼리보다 여럿이 함께 어울려 다니는, 어떤 동아리 의식도 강하고 말이죠. 연세대는 안 그래요. 진짜 사회인들과 같은 이성교제를 합니다. 남자와 여자로서 눈에 불꽃이 일고 사랑에 빠집니다. 연애하는 거죠. 그러면서 연애 초기부터 결혼을 생각하고 약속하고 말이죠. 물론 모두 그렇지야 않겠지만 그것이 경향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봐요.”

SKY 기질에 대한 이런 설명들을 염두에 두고 과연 그들 각각의 기질이 사회적으로는 어떻게 ‘반영’되는지 따져보자. 곧 각 학교 졸업생들이 과연 어떤 분야로 얼마나 진출해서 두각을 나타내는지, 현상을 숫자로 파악해 보자. 앞서 본 것처럼 SKY 3개교는 지금까지 도합 70여 만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왔다. 그 70만이라는 수가 갖는 의미는 사실 간단치 않다.

숫자로 본 SKY의 기질과 위상

SKY 3개교 졸업생들이 100% 생존해 있다고 가정해도 그들을 합쳐봐야 우리 인구의 1.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나마 이들 학교가 지난 한 세기를 지나오는 동안 졸업생 가운데 상당수가 유명을 달리(3세대 이상이 지났으므로 70만명 중 3분의1은 될 것이다)했으리라는 점에서 현재 우리 인구대비 ‘SKY 인구’는 실제로는 1%가 채 되지 않을 것으로 추산된다. 문자 그대로 극소수(極少數)다. 그런 극소수가 지금까지 우리 현대사에서 차지해온 ‘자리의 무게’는 어떤가.

먼저 정치권에서 SKY가 차지하는 비중은 앞서 14대, 15대, 16대 국회의원 통계에서 짐작할 수 있다. 3대에 걸친 전체 국회의원 871명 가운데 SKY출신은 476명, 54.6%로 나타난다. 시험을 쳐서나 누가 끌어줘서 되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다수의 ‘민의’(民意)에, 표(票)에 운명을 맡겨야 하는 것이 국회의원선거다. 자기가 하고 싶다고, 열정과 실력과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닌 이 정치판에서조차 SKY는 발군의 실력을 보여왔다.

선거로 자리를 차지하는 국회에의 SKY 진출도가 이 정도니, 자신의 의지와 능력과 노력을 발휘해 오를 수 있는 관직(官職)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이 SKY가 독주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18개 부처(현행 기준)별로 학력이 명확히 알려진 장관 수는 모두 692명. 이 가운데 군 출신으로 채워진 국방부 장관 37명을 제외한 17개 부처의 장관 수는 655명이다. 이들을 SKY 출신대학별로 분류하면 흥미로운 몇 가지 결과가 도출된다. 당장 SKY 출신 인사들이 359명으로 절반 이상(55%)을 차지한다.<오른쪽테이블아이콘 참조> 이는 사실 국내 대학 출신자 가운데는 SKY 출신이 장관 자리를 거의 독식(獨食)하다시피 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장관 가운데 일본 대학 출신이 125명이고 육사 출신도 44명에 달하는데, 이들과 SKY를 합치면 전체 장관 자리의 80%가 넘는다. 나머지 대학 가운데서도 상당수가 미국유학파 출신임을 감안하면 사실 SKY 외의 다른 국내 대학 출신 장관은 소수에 그친다.

연세대, 역대 5개 부처에 장관 1명도 못 내

SKY 중에서도 역시 서울대가 연고대 출신을 합한 것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283명(43%)의 장관을 배출했고 고려대 출신은 49명(7%)이었다. 정치권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연세대가 상대적으로 가장 적어 고려대의 절반 수준인 27명(4%)의 장관을 낸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연세대는 노동·환경·농림부 등에서 장관을 한 사람도 내지 못했다. 전통적으로 법대는 서울대와 고려대가 강세를 보여 왔다는 ‘전설’에 부합되게 서울대는 전체 법무부 장관 53명 중 24명(45%)을 배출했고 고려대도 9명(17%)의 장관을 배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연세대 출신은 법무부 장관을 한 사람도 내지 못해 상대적으로 법대쪽이 약세임을 보여줬다. 이는 역대 검찰총장 수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검찰총장의 경우 30명 가운데 서울대 출신이 절반을 넘는 16명(53%)이었고 고려대는 6명(20%)인 반면 연세대는 한 사람의 검찰총장도 내지 못했다. 앞의 정치권 통계와 연관시켜 보면 연세대 출신들은 정계나 관계쪽으로 별로 진출하지 않았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반면 연세대는 교육쪽에서 고려대에 비해 훨씬 많은 장관을 배출하는 특징을 보였다.

장관뿐 아니라 실제로 공무원이 자기 노력으로 당도할 수 있는 최상위 자리라고 하는 국장급 이상 고위직도 마찬가지다. 2001년 3월 중앙인사위원회 자료를 보면 중앙부처의 국장급 이상 1급 공무원 243명 가운데 SKY 출신이 무려 176명으로 72.4%를 차지했다. 절반을 훨씬 넘는 56.4%를 서울대가 차지했고 고려대가 8.2%, 연세대가 7.8%였다.
경제쪽은 어떨까. 재계에서는 흔히 “사학(私學) 경영학과의 양대 산맥인 고려대와 연세대 경영학과 출신들을 합치면 서울상대 출신보다 많다”는 얘기가 회자돼 왔다. 서울대가 독주(獨走)하고는 있지만 700명에 달하는(연세대·고려대 동문회 추산) 대기업·중소기업의 쟁쟁한 CEO들이 ‘사학 파워’시대를 열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과연 실제로는 어떨까. 기자는 이번 SKY 취재를 계기로 아예 국내 주식시장에 상장된 665개 기업의 CEO들(2002년 12월 현재)의 출신대학을 전수조사해 보았다.

지난해 상장된 이들 기업의 대표이사 중 ‘회사연감’(매일경제신문, 2002)에 CEO 학력을 명시한 기업은 모두 503개. 이들 기업의 CEO 647명을 대상으로 기자가 조사한 결과는 SKY가 전체의 절반을 넘는 53%로 나타났다. 서울대가 173명으로 26.7%를 차지해 고려대(90명, 13.9%)와 연세대(80명, 12.4%)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기업의 규모가 크면 그만큼 SKY 출신이 늘어나는 현상도 발견됐다. 월간 ‘현대경영’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1년 매출액 규모 100대 기업의 CEO 152명 가운데 SKY 출신이 109명으로 무려 71.7%를 차지했다. 서울대가 68명(44.8%), 연세대 24명(15.8%), 고려대 17명(11.1%)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문경영인들만 추려봐도 SKY 출신들은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것으로 집계된다. 2001년 ‘월간중앙’이 국내 전문가집단과 함께 선정한 ‘한국의 대표 전문경영인 50인’을 보자. 50인 가운데 당장 SKY 출신이 전체의 78%나 됐다. 서울대 출신이 27명으로 절반을 넘어 54%를 차지해 역시 기업부문에서도 서울대가 ‘압도적 수월성’(秀越性)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대에 이어 연세대 6명(12%), 고려대 6명(12%)이었다.

386 리더그룹도 SKY가 주도

금융쪽은 SKY 출신들이 최상부를 아예 ‘장악’하다시피 한 느낌이다. 지난 1999년 ‘서울경제신문’이 펴낸 ‘한국을 움직이는 77인의 금융인’은, 국내 은행·보험·증권·투신·종금·카드·신용금고·창투사 등 금융계 모두를 망라해 금융업계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외국인 1명을 제외한 전체 76명 중 SKY 출신이 모두 64명으로 무려 84%에 이른다. 학교별로는 서울대가 단연 앞서 44명(58%)이나 됐고 그 다음으로 연세대가 11명(14%), 고려대 9명(12%)이었다.

언론계도 보자. 마감시간에 쫓기고 또 자료 수집의 어려움으로 기자들 전체에 대한 조사는 진행하지 못한 대신 언론계 부장급 이상 간부들 가운데 SKY 출신이 얼마나 되는가 세어 보았다. 1999년 3월 ‘월간중앙’과 전문가집단이 선정한 ‘한국의 리더’가운데 언론편을 기본 자료로 삼았다. 당시 중앙일간지와 방송사의 최고경영자에서 부장급까지 선정된 간부는 466명.

이 가운데 SKY 출신은 302명으로 65%나 됐다. 서울대 출신이 가장 많은 172명(37%)이었고 고려대가 83명(18%), 연세대가 47명(10%) 순이었다. 흔히 ‘조중동’(朝中東)으로 불리는 중앙 3대 일간지의 경우는 특히 SKY 출신이 많아 78%(133명 중 104명)에 달했다. 여기서도 역시 서울대가 많아 57명으로 43%, 고려대가 28명으로 21%, 연세대가 19명으로 14%의 분포를 보였다.

놀라운 것은 그 같은 SKY의 부상(浮上)과 독주(獨走)가 기득권층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이번 16대 대통령선거에서 노무현 후보의 당선 분위기를 주도한 핵심세력으로 꼽히는 이른바 ‘386’세대에서도 단연 SKY 출신들이 두각을 나타낸다는 지표가 있다. 1999년 5월 월간 ‘말’이 전문가집단과 선정한 ‘21세기 한국의 희망, 386 리더’라는 자료가 그것이다. 정치·경제 등 12개 분야에서 주목받는 1,000명의 젊은이들을 망라한 통계다.

선정 대상이 된 12개 분야 중 ▷시민과 청년사회 ▷정치 ▷경제 ▷문화 ▷언론 ▷법조 등 주요 6개 분야 517명 가운데 SKY 출신은 모두 281명으로 절반 이상(54%) 꼽혔다. 학교별로는 여기서도 역시 서울대가 517명 중 161명으로 31%를 차지했고 고려대가 61명으로 12%, 연세대가 59명으로 11%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특히 언론부분인데 이 분야에서 ‘젊은 리더’로 선정된 126명 가운데 93명, 곧 74%가 SKY 출신이었다. 서울대는 여기서도 위력(?)을 보여 그 절반을 넘는 64명(51%)이 선정됐다.

지금까지 살펴본 통계들은 당장 SKY 출신이 기성세대든 젊은 세대든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력(主力)임을 압축해서 탁 보여준다. 1%가 채 안 되는 그 졸업생들이 우리 사회 ‘각계각층’아닌 ‘각계상층’의 얼추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위의 통계를 통해 우리는 SKY 3개교를 서로 비교해볼 수 있는 몇 가지 ‘명제’들을 도출해 볼 수 있다.

먼저 ‘역시 서울대가 톱(top), 그것도 다른 두 학교마저 압도하는 정점에 올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서울대 법대 출신 문종국(41) 변호사는 “우리의 20세기는 효율과 생산성, 노하우 같은 것이 가장 중시되는 근대화의 시기였고 그런 과정에서 개인에게 요구된 것은 무엇보다 뛰어난 업무파악 능력, 신속한 업무처리, 정확한 관리와 통제능력”이라고 전제하고 “서울대는 국가가 말 그대로 근대화에 필요한 두뇌와 인재들을 혜택을 주어가며 양성하려고 만든 대학이었던만큼 그곳 출신들이 사회에서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며 상층부를 차지하게 된 것”이라고 의견을 말한다.

통계상으로는 고대가 연대보다 좀더 약진

눈에 띄는 또 한 가지 특징은 도처(?)에서 고려대 출신들이 연세대 출신들보다 좀더 ‘약진’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법대와 정외과의 전통이 강한 고려대 출신들은 정·관계쪽으로, 상대와 의대 전통이 강한 연세대 출신들은 역시 재계와 의학계 쪽으로 많이 진출’한다는 것이 사실 그간의 통념이었다.

그러나 이번 통계수치들이 보여주는 현상은 좀 다르다. 우선 상경대 전통이 좀더 강한 것으로 인식돼온 연세대 못지않게 고려대가 상경계열에서 두각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나아가 정치·경제·언론의 상위층에 고려대 출신이 연세대 출신보다 상대적으로 좀더 진출했다는 경향이다. 강상현 교수의 추정.

“우선 숫자가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고 또 고려대 출신은 겉으로 드러나기 쉬운 기질인 반면 연세대 출신들은 좀더 자유로운 스타일과 겉으로 나서려고 하지 않는 기질 때문에 ‘통계로는 잘 잡히지 않는’ 자유직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고 전문적인 분야에 있더라도 눈에 잘 띄지 않는 포스트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점 때문에 통계로는 나타나지 않을 뿐이지 실제로는 연고대간 어떤 격차가 있다거나 우열이 있다거나 하는 것은 지나친 통계적 단순화가 아닌가 보입니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연고대 간에는 그런 ‘상위층 분포도’가 엎치락뒤치락 하는 현상이 일반적일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실 연세대 출신들은 어쩐지 좀 치열하게 살기보다 덜 치열하게, 대신 즐겁게 사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앞서 서울대총동창회 이세진 사무총장의 “연세대 출신은 안분자족’(安分自足)”이라는 말이 상기되는 대목이다.

SKY의 고민, SKY의 숙제

img3L지난 100년 동안 숙성돼온 SKY 기질을, 과연 SKY는 21세기에도 계속 공고하게 유지해 나갈 수 있을까. 국내 톱 클라스 랭킹의 실력에 바탕한 명성과 위상, 그리고 다시 거기서 빚어지는 각 학교의 기질과 기백을 SKY는 이어갈 수 있을까. 장담하기 어려운 상태다.

먼저 SKY에 진입하는 학생들이 변질(變質)되고 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지난해 서울대측이 내놓은 ‘신입생 지역할당 선발제도’다. “시간이 갈수록 교육 여건이 좋은 대도시, 그것도 서울 강남지역 출신 신입생이 늘어나고 있다”는 전제 아래 “이 같은 교육기회 접근의 불균등을 시정하기 위해 지방별로 일정수 신입생을 할당해 선발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실제로 서울대가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2001년도 신입생 가운데 무려 77%가 대도시와 광역시 출신으로 나타났다. 특히 전체 신입생 가운데 서울지역 출신이 절반에 가까운 47.3%를 차지하는 극도의 편중현상을 보였다. 나아가 강남·서초·송파·강동 등 이른바 ‘로열학군’으로 분류되는 서울의 강남·강동교육청 산하에 1,314개의 유명 입시학원이 몰려(서울 전체 4,207개 학원 중 31%), 서울 내에서도 교육 여건 격차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대 신입생 가운데 읍·면 이하 출신은 3% 남짓이었다. 200여 읍·면 등에서는 아예 서울대 신입생을 내지 못했다.

그것은 서울대의 기질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오늘날 서울대는 분명 과거의 서울대가 아니다. 먹고살기 어려운 가난했던 시절 입신양명의 꿈을 안고 서울로 몰려들던 가난한 수재들의 대학이 더 이상 아닌 것이다. 이같은 상황은 서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연세대와 고려대 역시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있는 집’ 학생들이 대거 SKY에 입학하는 상황에서 학교의 학풍이나 학생들의 기질이 예전과는 크게 달라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과연 SKY에는 ‘강남지역 학생’들이 얼마나 들어갈까. 각 학교에서는 그것만 추려내는 통계는 현실적, 기술적 어려움이 있다는 대답으로 난색을 표했다. 다만 학교 관계자들은 “성적이 가장 중요한만큼 절반 가까운 학생들이 강남권·분당권·일산권 그리고 수도권에 집중된다”는 대답을 전해 주었다.

TV와 컴퓨터·휴대폰…. 풍요함 속에 ‘왕자와 공주’로 자라난 ‘신세대 SKY’가, 시커멓게 물들인 군복에 군화를 신고 학교를 다니던 ‘옛날 SKY’ 선배들과 같은 기질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자가 만난 많은 사람들은 일산과 분당 신도시가 생기고 컴퓨터와 휴대폰이 일반화된, 말하자면 우리 사회에 주거와 매체 혁신이 이뤄진 1990년대 이후 세대에서는 전통적인 SKY 기질이 사라지고 대학가 전체의 이른바 ‘유니컬러’가 확산됐다고 본다.

그것이 좋은 현상이냐 나쁜 현상이냐를 평가할 수는 없다. 다만 1980년대 초반 대학을 다닌 기자의 입장에서도 ‘그 시절 그 기질’에 대한 어떤 향수를 갖고 있다. 그 농도(濃度)도 진하다. 기자의 동년배들, 나아가 기자의 선배들 역시 누구랄 것 없이 그 같은 향수를 갖고 있을 것으로 기자는 미루어 짐작한다. 그런 세대에게 지금 SKY를 뒤덮어가고 있다는 ‘신세대 유니컬러’현상은 분명히 안타깝고 서글픈 일이다.

20세기에 걸쳐 SKY는 그 실력과 기질과 기백을 안팎에서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20세기의 일이다. 21세기 SKY가 처한 환경은 변했다. 암기력이 경쟁력이던 세상에서 창조력과 판단력이 경쟁력인 세상으로 바뀌고 있다. 게다가 SKY에 들어가는 학생들도, 대학측이 아무리 이런저런 장치를 마련한다 해도 과거와는 사뭇 다른 ‘신인류’로 바뀌고 있다.

그 가운데 놓여 있는 교육 중심체로서의 SKY는 과연 어떤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가. 100년씩 된 은행들이 퍽퍽 쓰러지고 차근차근 변화에 대비해온 후발은행들이 그 선발은행들, 말하자면 ‘금융권의 SKY’를 접수해 나가는 현실을 대학쪽으로 적용시켜 보면 ‘천하의 SKY’라 할지라도 모골이 송연할 것이다.

기회를 선점한, 그래서 여타 대학들보다 21세기에도 뜀박질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는 SKY가 과연 그것을 얼마나 활용하면서 변화를 꾀하고 있는지, 과연 21세기에도 실력에 바탕한 그들만의 기질과 기백을 이어나갈 것인지 궁금하다. 박노준 교수의 얘기로 SKY의 기질 그리고 SKY의 ‘오늘과 내일’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는 “SKY는 사실 대등하게 이 사회를 이끌어 왔다”고 전제하고 “앞으로도 서로의 학풍과 기질을 살리면서 좋은 쪽으로, 우리 사회의 건전한 엘리트로 협력해 사회를 이끌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는 일반인들에게 잘못 인식된 것을 하나 지적하고 싶어요. 뭐냐 하면 지난 근대화, 산업화 시기에 사람들은 관학(서울대)이 한국을 이끌어 왔다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사실 그것은 양대 사학(고·연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거죠. 건국 초기에는 관학을 통해 인재를 주로 등용하는 편중성이 분명히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학들이 그에 못지않은 많은 인재와 일꾼들을 배출해 냈어요.

정계·관계·재계·법조계·체육계는 물론이고 각종 학술·문화·예술·언론계에 서울대와 고·연대가 나란히, 대등하게 진출해 서로 힘을 합하고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해가면서 나라를 이끌어 왔다는 사실을 이 기회에 얘기하고 싶습니다. 더욱이 그 3개 대학뿐만이 아니에요. 사실 이들 3개 대학 외에 서강대다, 한양대다, 경희대다, 성균관대다 해서 얼마나 우리 대학들이 저마다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또 실제로 많은 인재를 배출해 냈습니까. 이번 기사는 물론 3개 대학만 국한해서 얘기한다니까 거기에 대해서만 내가 한 마디 하겠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연구실 구석의 소형 냉장고에 가서 냉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과연 SKY가 과거에 가졌던 명문 의식, 막연히 뻐기는 그런 의식이 아니라 진짜 민족과 국가와 사회에 대해 우리가 엘리트로서 단단히 한몫 한다는 명문 의식을 가질 수 있는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들어갈 때 시험 좀 잘 쳐서 문제 몇 개 더 맞추고 들어간다고 해서 SKY가 아니에요. 그들이 SKY에서 교육받고 거기서 인성(人性)과 기질을 형성하고 사회에 진출해 하는 일과 역할 덕분에 명문 소리를 듣는 것이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과연 SKY는 명문이었는가, 계속 명문의 자리를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인가를 어느때보다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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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e Jobs

함께 사는 세상 2011. 10. 6.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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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six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cent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dollars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Stay Hungry. Stay Foolish.

Thank you all very m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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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로, 다섯 번째 지방선거가 끝났다..
그 간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 실망스럽고 걱정스러웠는데,
생각보다 선전한 진보진영의 모습에 기쁘면서도 안타깝다..

무엇보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람들이 강원지사와 충남지사, 경남지사로 당선된 것에 감사하다.. 서울과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민주당 출신 후보들이 대거 당선된 것도..

가장 중요한 서울시장, 경기도지사, 인천시장 선거에서..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를 내준 것이 못내 아쉽다..
노회찬과의 단일화가 아쉽다.
더 이상 광화문 광장을 되찾자는 구호를 외치지 말라는 한 시민의 댓글이 맘에 와닿는다...

경기지사에서 심상정 후보가 사퇴하지 않고 이런 결과 나왔으면, 아마 죽을때까지 미워했을 거다..
인천시장에서 민주당이 승리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민주당 기득권자들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한나라당처럼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일방적으로 밀어부치지는 않을테니까...
적어도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로 북한을 적대시하지는 않을테니까...

2~3년 후 대선과 총선을 기대해본다..
한나라당에는 국회의석을 단 한 석도 내주어선 안된다. 자신들 이익에 맞춰 국민의 의사와 관계없이 법을 바꿔버리는 놈들이다..
4대강과 세종시.. 그리고 대북관계..... 생각할수록 가슴이 먹먹하다..

선거 하루 전, 지식경제부장관의 신문사 인터뷰 기사를 보니 영리 목적 의료법인 추진도 선거 이후 추진한다고 한다. 자신들이 하고 싶었던 일들, 국민 의사와 관계없이 선거만 끝나면 다 추진한다는 거다... 그 기사를 보면서, 첨으로 우리나라에 살기 싫다는 마음이 생겼다... 희망이 없다.. 가진 자들이 국가 정책을 이용해서 자신의 부를 더 많이 축적하고 있다.. 자기들의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국가 정책을 이용한다.. 그들은 나같은 사람이 평생 생계를 위해 일하게 하고, 그 결과로 얻어지는 이익은 고스란히 자기들 몫으로 챙길 수 있는 사회적 구조를 더욱 견고하게 가꾸고 있는 것이다... 더욱 견고하게..

어서 정권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이명박이 교회 장로라는 것이 싫다...
교회가 가진자들의 논리와 이익을 대변하는 이익집단이 되어 버린 현실이...
너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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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발행부수 많은 일간지만 읽고 지상파 방송만 보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4대강사업에 반대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스스로 입에 재갈을 물렸는지 아니면 암묵적 담합이 있었는지 몰라도, 웬일인지 4대강사업에 대해서는 언제나 굳게 입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 정론지 뉴욕타임즈는 "보도하기에 적합한 모든 뉴스를 보도한다(All the News That's Fit to Print)"라는 모토를 내걸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보수 언론은 언제부터인가 "내가 원하는 뉴스만을 보도한다(Only the News That I Want to Print)"라는 모토를 채택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눈을 돌려 좀 더 균형 있는 보도에 접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그들에 따르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4대강사업에 반대를 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극소수의 정치적인 지식인, 종교인만이 반대를 하고 있을 뿐, 말 없는 다수는 4대강사업에 대해 변함없는 지지를 보내고 있다. 정부가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화를 제의해도 이들은 일방적으로 그 제의를 거부하고 있다. 보수언론은 지금 우리에게 이처럼 자기 마음대로 왜곡한 진실을 믿도록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보수 언론에 세뇌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세상 돌아가는 형국을 보면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 뻔하다. 그들은 대통령과 정부가 4대강사업에 반대하는 사람을 향해 날이 선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이유가 무언지 궁금해 한다. 반대하는 소수의 지식인, 종교인을 그냥 무시해 버리면 될 텐데 구태여 그들에게 날을 세우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무슨 일이든 반대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그렇게 일일이 신경을 쓸 필요가 있을까? 아마 이런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이다. 아무리 진실을 가리려 해도 언제든 밝혀지게 마련이다. 보수 언론이 개별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왜곡 보도를 한다 해도 그림 전체를 짜맞추면 진실이 반드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4대강사업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통령과 정부의 공격에 관한 기사를 보고 사람들은 반대하는 세력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보수 언론이 그것을 보도한 의도는 4대강사업을 띄워 주려는 데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과 관련된 진실을 만천하에 알린 셈이 된다.

보수 언론이 아무리 가리려 해도 가릴 수 없는 진실은 4대강사업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세력이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숱한 문제들로 운동 집단이 형성되고 해체되었지만, 지금까지 4대강사업 반대 그룹처럼 규모가 큰 집단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회복을 목 타게 갈구하고 있던 시절에도 지금처럼 우리나라 4대 종교집단이 모여 한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어떤 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몇 천 명이나 되는 대학교수가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낸 경우도 전혀 없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사상 초유의 대규모 사회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취미 삼아 한 번 모이자는 식으로 만들어진 집단이 결코 아니다. 우리 국토 전체의 안위가 달려 있는 심각한 문제를 팔짱만 끼고 바라볼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뭉쳐진 집단이다. 따라서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갈 수는 없게끔 되어 있다. 이들에게 4대강사업을 계속해야 하는 명확한 이유를 납득시키지 못하는 한 반대 의사를 스스로 철회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통령과 정부는 이들이 왜 4대강사업에 반대하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는커녕, 홍보 부족으로 인해 실정을 잘 모르고 반대한다는 말로 받아치고 있다. 소통이 없는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이 문제라고 지적하는데, 듣지는 않고 내 말 더 들어보라고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4대강사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정치적 목적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고 역공을 취하기도 한다. 상대방의 말은 단 한 마디도 들으려 하지 않는 독선과 아집에 기가 막힐 따름이다.

4대강사업 반대 그룹의 일원으로서, 나는 실정을 몰라서 반대하고 있다는 말에 심한 모욕감을 느낀다. 이 사업에 경제적 측면 못지않게 환경공학적, 수문학적, 생태학적 측면이 중요성을 갖는 것은 사실이며, 내가 그 방면의 전문가가 아니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조건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동안 부지런히 4대강사업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해 왔으며,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지식을 축적했다.

내가 신뢰하는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4대강사업은 환경공학적, 수문학적, 생태학적 측면에서 전혀 쓸모없을 뿐 아니라 매우 큰 위험성을 수반하는 사업이다. 나는 그들이 엄밀한 과학적 근거 위에서 그와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이에 비해 지금까지 정부가 4대강사업이 필요하다는 근거로 내세운 것들을 보면 믿음이 전혀 가지 않는 엉터리 논리뿐이다. 게다가 내가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는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거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타당성을 결여하고 있는 사업이다.

정치적 목적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는 말은 한층 더 모욕적으로 들린다. 그 동안 나에게 배운 수많은 제자들이 증언해 주겠지만, 나는 일생을 정치와 담을 쌓고 살아온 사람이다. 비록 능력과 노력 부족으로 인해 훌륭한 업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고 학자로서의 한 길을 걸어온 데에 대해서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앞으로도 정치판에 발을 들여 놓을 의사가 추호도 없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 나에게 정치적 목적 운운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들린다. 다른 교수, 신부, 목사, 스님, 교무들 어느 분에게도 그런 말을 입에 담기라도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내 양심을 몽땅 걸고 4대강사업에 반대하고 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경제학자로서의 양심에 비추어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행동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 동안 나는 이런 저런 각도에서 왜 4대강사업을 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 많을 글을 써 왔다. 실정을 몰라서 반대한다는, 정치적 목적에서 반대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공격에 반박하기 위해 내가 왜 4대강사업에 반대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밝혀 보려고 한다.

2. 4대강사업은 시대착오적인 '강 죽이기'다

한반도대운하사업 얘기가 나왔을 때 사람들이 가장 주목했던 것은 그 사업의 시대착오적 성격이었다. 아니, 비행기로 화물을 나르는 세상인데 강 위에 느림보 화물선을 띄워 물류혁명을 일으키겠다고? 한 마디로 한반도를 길게 관통하는 운하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해외토픽에나 나올 시대착오적 발상이었다. 대선 때 내건 공약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겠다고 다짐했지만 국민의 반응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취임 반년도 안 되어 그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의 필연이었다.

한반도대운하 계획을 포기하겠다는 발표가 나온 지 몇 달 후 뜬금없이 등장한 4대강사업은 온통 초록색 분칠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녹색뉴딜'이라는 가당치 않은 구호와 함께 나타났기 때문에 시대를 앞서가는 성격의 계획이라고 오해하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한반도대운하사업을 4대강사업으로 '이름 세탁'을 했다고 해서 공사의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이름과 명분이 바뀌었어도 시대착오적이며 반생태적인 사업의 본질은 털끝 하나 바뀌지 않았다. 토목공사의 기본 내용이 한반도대운하의 경우와 똑같이 대대적인 준설과 여러 개의 댐(보) 쌓기인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물을 잘 흐르게 만든다고 물길을 똑바로 만들고, 물을 가둬 둔다는 목적으로 높은 댐 쌓는 것은 치수의 낡은 패러다임이다. 홍수 방지라는 명목으로 높은 시멘트 제방을 쌓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도 이미 오래 전에 밝혀진 사실이다. 강에 대한 인간의 간섭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자연의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 역시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다. 주지하다시피 지금 선진국에서는 강 주변에 만들어 놓은 인공구조물을 철거하는 것이 일종의 트렌드가 되어 있다.

4대강사업이 갖는 시대착오성은 외국 전문가에 의해서도 정확하게 지적된 바 있다. 세계적 과학저널인 사이언스(Science)지는 2010년 3월 26일 "Restoration or Devastation"이란 제목하에서 4대강사업에 관한 특집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서 지형학의 권위자인 UC버클리대학의 컨돌프(G. Mathias Kondolf)교수는 이 사업의 발상이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조금 길지만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한 문단을 그대로 인용해 보기로 한다.

"더욱 근본적으로 어떤 학자들은 그 계획[4대강사업]이 하천 관리에 관한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믿는다. '4대강사업은 선진국에서 하천 관리방식이 진화되어 온 길에서 벗어나 있다'라고 UC 버클리대학의 지형학자 컨돌프 교수는 말한다. 그는 유럽과 미국에서 개발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 이제는 강들에 굽이쳐 흐르고 넘쳐흐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데 역점을 둔다고 말한다. 이 접근방식이 생태적으로 더욱 건전할 뿐 아니라, 준설이나 제방축조로 인한 하천 관리작업을 필요 없게 만든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사업 담당자 홍씨는 이에 대해 한국의 강에 대해 자신들이 연구하고 사례 분석을 한 결과에 따르면 댐과 준설이 최선의 대안이라고 대꾸했다.

More fundamentally, some academics believe the plan reflected outdated thinking about watershed management. "The Four Rivers Project is out of step with the way river management is evolving in the developed world."

says G. Mathias Kondolf, a geomorphologist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He says planners in Europe and the United States now aim to give rivers room to meander and flood. This approach is more ecologically sound, Kondolf says, and eliminates river maintenance imposed by dredging and embankments. Project official Hong counters that based on their research and case studies of rivers in South Korea, dams and dredging is the best solution."

4대강사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말하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으려 할 테지만, 외국의 전문가가 말했으니 믿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는 댐 축조와 준설이 현재 선진국에서 하천을 관리하는 방식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시대에 뒤떨어진 접근방식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입만 열면 선진국을 본받자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왜 강에 대해서만은 선진국이 가는 길과 정반대의 길을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자기 편할 때만 선진국의 예를 인용하는 그들의 버릇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입맛이 영 씁쓸하다.

그리고 이 글에 나온 홍씨라는 사람이 누구를 뜻하는지 모르지만, 대답치고는 무척 궁색하다는 느낌이다. 도대체 몇 달 동안의 짧은 기간 동안 우리 강에 대해 무슨 심도 있는 연구를 하고 사례연구를 할 수 있었을까? 별 근거 없이 궁색함으로 모면하기 위해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 너무나 뻔하다. 최선의 대안이란 것은 몇 년의 기간에 걸쳐 수많은 모형실험을 거치고도 찾아내기 힘든 법이다.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4대강사업의 찬성논리가 대체로 이 정도로 엉성하고 뜬금없는 수준을 넘지 못한다.

강물이 자유롭게 굽이쳐 흐르고 넘쳐흐르도록 놓아두는 하천 관리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명확한 과학적 근거에 기초하고 있다.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이는 강바닥의 모래와 자갈이 엄청난 수질 정화의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엄청난 양의 오염물질이 강으로 흘러들어도 강물이 그런대로 맑음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부는 그것을 모두 준설해 강을 깨끗하게 만든다지만, 사실은 이 자연 정수기를 철저하게 망가뜨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강의 자정기능을 말살시켜 버리고 수질 개선한답시고 엄청난 혈세를 쏟아 부으려는 모습이 '병 주고 약 준다'는 속담을 생각나게 만든다.

또한 홍수 예방의 측면에서 볼 때도 자연스러운 강의 흐름에 섣불리 손대는 것은 위험한 장난이다. 그 동안 수많은 홍수를 겪으면서 자연은 나름대로의 방어장치를 만들어 놓았다. 적절한 장소 몇 곳을 둑으로 보완하기만 하면 자연 그대로의 강은 훌륭한 홍수방지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최근 우리가 경험한 대부분의 홍수 피해가 4대강사업의 공사 대상이 아닌 상류나 지류에서 일어났으며, 그나마 산림 파괴나 난개발로 인해 발생한 '인재(人災)'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무모한 4대강의 직강화가 어떤 초대형 인재를 초래하게  될지는 역사가 증언해 줄 것으로 믿는다.

한마디로 말해 4대강사업은 시대착오적인 '강 죽이기'에 불과하다. 자연 그대로의 강을 살려 둔 채 부분적인 손질을 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임에도 불구하고 댐 축조와 준설이라는 낡은 교리를 적용해 우리의 강들을 몽땅 죽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서 나는 이런 시대착오적인 토목공사를 결코 용납할 수 없다.

3. 생태계 교란은 위험한 불장난이다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이 공사의 본질이 '4대강 죽이기'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다. 강은 그 자체의 생명을 갖고 오랜 기간 동안 진화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강변의 하찮게 보이는 풀숲, 모래톱, 웅덩이라 할지라도 수억 년을 끊임없이 흐른 물길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생명체라고 볼 수 있다. 그것들이 수많은 홍수와 가뭄을 거쳐 갖게 된 오늘날의 모습은 자연의 이치를 그대로 나타내 주고 있다.

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오직 심미적인 측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가 아름답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자연에 섣불리 손대지 말아야 할 더 중요하고 더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원래 상태 그대로 잘 보존된 자연이 우리 인간에게 가장 이롭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실질적인 이득의 관점에서 볼 때도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수질 정화나 홍수 예방의 측면에서도 (약간의 보완을 가한) 자연 그대로의 강이 가장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정부가 무슨 말을 하든 4대강사업과 관련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국토 전체의 생태계가 몽땅 뒤집혀질 정도로 심각한 교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정부 자신도 현재의 상태에 심각한 교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진실은 감히 부정하지 못하리라고 믿는다. 청계천과 양재천의 작은 성공에 들떠있는 정부는 생태계 교란의 위험성을 전혀 모른 채 위험한 도박을 벌이고 있다. 썩어 있던 작은 물줄기들을 깨끗하게 만드는 일과 아무 문제가 없던 4대강을 뒤집어엎는 것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생태계에 대한 무지 때문에 4대강을 청계천과 양재천처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불장난인지 모를 뿐이다.

최근 섬진강에서만 사는 갈겨니가 난데없이 청계천에서 발견되어 우리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청계천 관리당국이 풀어 넣었는지의 여부는 확인된 바 없지만, 하여튼 청계천의 생태환경이 엉망으로 망가졌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말할 수 있다. 깨끗한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서식하는 물고기의 종류가 크게 늘었다는 선전도 거짓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지금 정부가 온 국토의 강들을 청계천의 꼴로 만들어 놓으려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청계천의 예를 보면 4대강사업이 모두 끝난 후 강 주변의 생태계가 더욱 풍성해지리라는 정부의 호언장담이 어디서 나오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여기저기서 물고기 잡아와 4대강 아무 곳에나 풀어 놓겠다는 심산인 것 같은데, 한강에만 사는 물고기가 영산강에서 발견되는 일 같은 것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 놓고는 강물이 깨끗해져서 서식 어종이 더욱 풍부해졌다고 거짓 홍보를 해댈 것이 틀림없다. 우리나라 큰 강들이 고유의 생태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초대형 어항이나 수족관으로 변화한다는 뜻인데, 그렇게 되면 생물학 교과서를 바꿔 써야 하는 일이 생길지 모른다.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르는 무신경의 소유자들이 지금 우리나라를 다스리고 있다.

생태계의 교란은 그 귀결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특히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전국의 4대강을 온통 뒤집어엎은 후 우리 국토 전반에 걸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자신 있게 예측하지 못한다. 기후가 어떻게 변화할지, 지하수 수위가 어떻게 변화할지, 혹은 어떤 동식물의 종이 사라지고 어떤 종이 새로 나타날지 전혀 모르는 상태다. 최근의 언론 보도를 보면 새만금사업의 여파로 인근 변산해수욕장의 모래가 몇 미터 깊이로 파여 나가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새만금사업이 시작되기 전은 물론 공사가 진행되고 있던 과정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다. 전 국토에 걸쳐 이런 예기치 못한 결과들이 속속 나타난다면 얼마나 당황스럽게 될지 상상해 보기 바란다.

4대강사업으로 전 국토의 생태계가 엉망으로 망가지면 원상회복을 하고 싶어도 하기가 어려울 테니 걱정이 더욱 크다. 뿌리째 뽑혀나간 나무들과 풀이 다시 무성해지려면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강바닥의 모래를 몽땅 긁어내는 바람에 산란장을 잃은 물고기들이 다시 떼지어 다닐 만큼 그 수가 늘어나려면 더 긴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더군다나 불도저와 포클레인으로 뭉개진 모래톱과 습지는 영영 되살아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목전의 이득에 눈이 어두워 이런 위험한 일을 저지른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4대강사업의 반(反)생태성은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수만, 수억 년을 평화스럽게 살아오던 뭇 생명들을 죽음의 구렁이로 내몰고 있다. 요즈음 인터넷상에서 나도는 사진들을 보면 4대강사업이 우리 국토를 얼마나 처참하게 망가뜨렸으며,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죄 없는 생명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그들도 우리 인간과 똑같은 생명의 권리를 갖고 이 땅에서 터 잡고 살아가는데, 도대체 우리가 그들을 떼죽음으로 몰아갈 그 어떤 권리를 갖고 있다는 말인가? 한 인간으로서의 내 양심은 이 거대한 '죽음의 사업'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4. 정당한 절차가 무시된 반민주적 사업이다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지금 4대강사업과 관련해 우리 민주주의는 중대한 시련에 직면해 있다. 이 사업이 그대로 강행되느냐 아니면 중단되느냐에 따라 민주주의적 원칙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고 그대로 지켜질 수도 있다. 국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개인적인 신념 하나만에 의해 강행되고 있는 4대강사업은 명백한 반민주성을 갖고 있다. 이것을 막지 못한다면 어렵게 얻은 이 땅의 민주주의는 또 다시 시궁창에 내던져지는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잘 알다시피 4대강사업은 불과 몇 달 동안의 밀실작업의 결과로 급조된 토목공사다. 무리하게 추진되다 좌절된 한반도대운하사업과 달리, 4대강사업은 대선공약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 그 정체를 드러냈다. 그리고는 이렇다 할 공론과정도 거치지 않고 집권여당이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국회에서 관련 법안을 서둘러 통과시킴으로써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일을 해치워 버렸기 때문에, 그 사업을 한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삽질이 시작되고 전국의 강은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정부는 모든 절차를 지켜 공사에 착수했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형식상의 절차를 지켰을지 몰라도, 상식의 선에서 보면 결코 정당한 절차가 지켜졌다고 말할 수 없다. 예컨대 불과 몇달 동안의 짧은 기간 동안에 그와 같은 초대형 토목공사의 환경영향 평가를 끝마쳤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단순한 토목사업도 몇 달 안에 끝내기 힘든 마당에, 전국에 걸친 생태계에 거의 지각변동에 가까운 영향을 줄 사업의 평가를 몇 달만에 끝마쳤다면 보나마나 부실평가였음에 틀림없다.

22조원이나 드는 초대형 토목사업인데 거의 모든 비용지출이 예비타당성조사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것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정부는 "국가재정법 시행령 13조에 따라 보 설치, 하천 준설 등의 사업은 재해 예방사업이기 때문에 예비타당성 조사 대상이 아니다"라고 변명한다. 궁색하기 짝이 없는 변명인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편의주의적 행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형식적으로 법 규정만 지켰다고 절차의 정당성이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렇다 할 여론 수렴의 과정 없이 대통령의 지시 하나만으로 사업계획을 짜기 시작했다는 것부터가 민주주의의 원칙에 어긋난다. 모두가 잘 기억하고 있겠지만, 4대강사업이란 말이 처음 나왔을 때 제대로 된 토론회 하나 열려 본 적이 없다. 모든 보수언론은 약속이나 한듯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업 그 자체에 대한 정보조차 갖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국민을 이렇게 무지의 상태에 몰아넣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추진된 사업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4대강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구도에서는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이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다. 입법부와 사법부가 견제를 함으로써 행정부의 독주를 막고 건전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원칙은 거수기 역할에 충실하기로 결심한 거대여당이 국회를 장악함으로 인해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사법부가 간간히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그때마다 정부와 보수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비틀거리기 일쑤다. 그나마 사법부의 견제도 아주 사소한 사안에 관해서만 행해지고 있을 뿐, 국가운영의 기본틀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이다.

사실 견제와 균형은 행정부 안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각 부처의 성격에 따라 이와 같은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져야 합리적인 정책 수행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4대강사업의 주무부서가 국토해양부라 해서 다른 부서들이 일체 관심을 끊고 방관만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만약 이 사업에서 나오는 파장이 국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바로 자기 부서의 관심분야라 한다면 제3의 부서라도 당연히 그 사업에 간여해 견제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예를 들어 환경부의 입장에서 볼 때 4대강사업이 환경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다면 이에 대한 경보를 발령해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환경부의 존재이유라는 사실에 한 점 의문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4대강사업과 관련해 환경부는 그 존재이유를 망각하고 거수기로 전락하는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말았다. 환경에 대한 위험요인을 찾아내고 대비책을 촉구해야 할 환경부가 오히려 만세를 불러주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본다 해도 이런 사례는 찾기 힘들 텐데, 내가 내는 아까운 세금이 왜 이런 부서의 유지를 위해 쓰여야 하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나아가 민주주의적 원칙이 제대로 구현되려면 제4부라고 할 수 있는 언론이 제 구실을 해줘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표적 일간지 3개사와 지상파 3개 방송국의 보도 태도를 보면 한숨만 나올 따름이다. 내가 이들에게 4대강사업의 반대투쟁에 앞서 주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도 현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데 그런 정도로 터무니없는 기대를 할 리가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최소한 객관적인 사실만이라도 정확하게 보도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한 사건조차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여론을 왜곡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지금까지 가톨릭 교단이 주교회의라는 공식기구의 결의를 통해 사회적 현안문제에 대해 목소리 낸 것을 본 적이 없다. 5천 여 명이나 되는 가톨릭 성직자들이 서명해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밝힌 것을 본 적도 없다. 아마 조선시대 기독교가 전파된 이래 처음 보는 중대한 사건이 아닌가 한다. 뿐만 아니라 2천 명이 넘는 선방의 수도승들이 사회적 이슈에 대해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사례도 처음 보는 일이다. 산사에서 오직 수행에 정진하고 있어야 할 수도승이 사회적 이슈에 목소리를 내는 것 그 자체도 신기한 일인데, 그 숫자가 2천여 명이나 된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도 보수 언론은 이 중요한 사건들을 거의 모두 무시해 버렸다. 단 한 줄의 기사도 싣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설사 기사를 싣는다 해도 시시한 상해사건보다도 더 작은 비중으로 다루기 일쑤다. 그 결과 대부분의 국민은 누가 무슨 이유로 4대강사업에 반대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이렇게 언론까지 적극적인 협조자로 전락해 버린 상황에서 정부의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을 견제할 방법은 하나도 남지 않는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 원칙이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현재 국민의 절반 이상이 4대강사업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은 정부 자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국민의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는 주요 종교 지도자들이 거의 모두 반대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4대강사업의 강행을 고집하는 것은 국민의 의견을 듣지 않고 독선적으로 나라를 이끌어가겠다는 뜻이다. 국민의 여론을 무시하고 사업을 강행하려 하는 정부 때문에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나는 이 비민주적인 4대강사업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5. 아무런 준비도 없는 졸속사업이다

4대강사업에 대한 정부의 홍보를 보면 왜 이 사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가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다. 불과 몇 달만의 밀실작업에서 태동한 사업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근거가 있을 리 만무하다. 정부가 이 사업을 해야 하는 당위성의 주요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수질 정화, 홍수 예방, 용수 확보 세 가지다. 그런데 왜 그런 목적의 사업이 필요한지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수치는 하나도 없고 그저 막연한 수사(rhetoric)로 채워져 있을뿐이다. 물고기와 새들이 죽어가고 있으니 빨리 강을 살려야 한다, 물 부족에 대비하기 위해 담을 그릇을 크게 만들어야 한다는 식의 허황한 수사 이상의 것을 발견하기 힘들다.

수질 정화를 위해 4대강사업이 필요하다는 점을 납득시키려면 현재 4대강의 수질오염이 어느 정도이며, 어떤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려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장기간에 걸쳐 4대강의 각 지점에서 정확한 오염도를 측정하고, 주요 오염원은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이런 정확한 데이터에 기초해 여러 가지 대책의 효율성을 비교, 평가하는 작업이 따라야 한다. 이런 포괄적인 분석작업의 결과 4대강사업 같은 대규모 준설 이외의 적절한 대안은 없다는 결론이 나와야 비로소 이 사업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내가 신뢰하는 우리 대학의 환경공학 전문가에 따르면, 지금처럼 4대강을 대대적으로 파헤칠 이유가 전혀 없다고 한다. 강 밑바닥의 흙이 오염되어 있는 사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나, 지극히 일부에 국한된 일이며 전역에 걸친 대규모 준설은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이다. 만약 정부가 이 주장을 반박하고 싶다면 4대강의 전 지점에서 채취한 토양 샘플이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면 된다. 이런 간단한 반박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정부가 아무런 객관적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좋은 증거다. 지금의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영산강과 낙동강의 물이 썩었다." 혹은 "겨울 갈수기가 되면 오염도가 특히 높아진다." 정도의 막연한 말을 늘어놓는 일뿐이다.

또한 물 부족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강물을 가둬 놓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논리적 근거도 무척 희박하다. 정부는 물 부족 사태가 올 것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뿐, 언제 어느 정도의 불 부족 현상이 나타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전망은 전혀 내놓지 못한다. 물 부족의 가능성을 점치는 유일한 근거는 외국의 한 사설 연구단체가 내놓은 신빙성 없는 보고서인 것 같다. 강수량을 인구로 나눠 얻은 이 조잡한 분석 결과는 많은 전문가들의 비웃음을 사고 있다. 이런 어설픈 분석 결과에 기초해 불 부족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것은 한 편의 코미디라고 말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우리가 가까운 장래에 물 부족 사태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앞으로 물에 대한 수요가 대폭 증가하거나 공급이 대폭 줄어든다고 예상할 하등의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물에 대한 수요는 우리의 생활방식 그리고 산업구조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만약 우리 생활방식이 어떤 이유로 갑자기 물을 훨씬 더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바뀐다면 물 부족 사태가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웬만한 집에서 모두 뒷마당에 수영장을 만들고, 매일 물을 갈아 넣는 일이 생긴다면 물이 부족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가까운 장래에 정말로 그런 일들이 발생할까? 구태여 대답을 기다릴 필요조차 없는 의문이다.

산업구조의 측면에서 볼 때도 물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증가해야 할 이유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서비스업에 비해 농업과 제조업이 물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사용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만약 서비스업의 비중이 더 작아지고 농업과 제조업의 비중이 더 커진다면 물 부족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경제의 산업구조는 그 정반대의 방향으로 재편되고 있다. 경제규모가 전반적으로 커짐에 따라 물에 대한 수요가 커질 수 있으나, 이 수요 증가폭이 산업구조 재편에 따른 수요 감소폭보다 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산업용으로 소비되는 물의 측면에서도 물 부족 현상을 야기할 이렇다 할 요인이 없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물의 공급이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할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지구온난화와 더불어 강수 패턴이 불규칙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나라 부근의 강수량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장기 전망이 나와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사막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신빙성 있는 전망이 나와 있다면, 용수 확보를 위해 4대강사업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약간의 정당성을 인정해줄 수 있다. 내가 모르는 그런 전망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나에게 가르쳐 주기 바란다.

나아가 홍수 예방을 위해 4대강사업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구체적 근거가 제시된 것을 본 적도 없다. 홍수 예방을 위해 그 사업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받으려면 무엇보다 우선 그동안 일어난 홍수와 관련된 통계를 제시하고 4대강을 어떤 방식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난날의 홍수 관련 통계를 보면 지금 토목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구간에서 일어난 사례가 지극히 드물다. 진정으로 홍수를 예방하기 위한 사업을 한다면 상류와 지류에 토목공사가 집중되어야 한다. 이는 그들이 내걸고 있는 홍수예방이란 목표가 아무 의미도 없는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4대강사업은 이렇다 할 준비도 없이 대통령의 지시 하나로 인해 몇 달의 짧은 기간에 급조된 초대형 토목공사다. 4개의 강에 대해 판박이와도 같이 똑같은 공사를 시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준비가 부실한지를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만약 철저한 사전조사를 통해 수질 정화, 용수 확보, 홍수 예방의 대책을 세운 것이라면, 토목공사의 내용이 강마다 달라져야 할 뿐 아니라 똑같은 강이라도 지점마다 달라져야 한다. 예를 들어 영산강은 수질 정화가 가장 시급한 과제인 한편, 금강의 경우에는 홍수 예방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영산강과 금강에서 이루어지는 토목공사의 내용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똑같은 영산강이라도 이곳에서는 습지를 정리하는 데 주력하는 반면, 다른 곳에서는 오염된 물이 흘러들어오는 것은 막는 데 주력한다는 식으로 지점마다 공사의 주안점이 달라져야 마땅한 일이다.

수질 정화, 용수 확보, 홍수 예방이 중요한 과제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정부가 4대강에 대해 한결같이 깊숙하게 준설하고 높은 댐을 쌓는 방식으로 이 과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아무런 심사숙고도 없이 즉흥적으로 대규모 토목공사를 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4대강의 모든 지점에서 판박이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면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마구잡이로 댐을 쌓고 강바닥을 긁어내고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토목공사의 과정에서 혹은 모두 끝나고 난 다음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더군다나 4대강사업처럼 사상 유례없는 대형 토목공사의 경우에는 돌발 상황의 발생 가능성이 특별히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예상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4대강사업본부가 과연 이런 대응책을 준비해 놓고 삽을 뜨기 시작했을까? 나는 절대로 아닐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약 그런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면 온 국민이 그것의 피해를 몽땅 뒤집어써야 한다. 정부는 지금 준비 안 된 졸속공사로 국민의 안위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는 셈이다.

6. 경제적으로 전혀 가치가 없는 사업이다

한반도대운하사업은 조잡하지만 그나마 비용-편익분석 결과를 내놓아서 경제적 타당성을 평가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그러나 4대강사업은 아예 비용-편익분석의 결과를 제시하지도 않고 있어 경제적 타당성의 평가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와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에 기초적인 비용-편익분석도 실시되지 않았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지난번에 쓴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나를 믿느냐? 그러면 따라 오라"는 식으로 사업을 밀어붙이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4대강사업과 관련된 비용-편익분석 결과를 제시하지 않은 것은 정부의 의도적 선택임이 분명하지만, 나로서는 그 배경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한반도대운하가 논의되고 있을 때 편익이 비용의 두 배 이상이라는 분석 결과가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던 것을 기억하고 이번에는 아예 그런 비판의 소지를 없애자는 의도가 깔려 있을 가능성이다. 그것보다 더욱 그럴듯하다고 생각되는 가능성은 몇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했기 때문에 비용-편익분석을 할 시간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구체적인 비용-편익분석의 결과 없이 제시된 4대강사업은 그 타당성 입증책임의 소재를 뒤바꿔놓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빚었다. 어떤 공공사업의 타당성에 대한 입증책임은 당연히 그것의 시행 주체인 정부에 있다. 그런데 요즈음 진행되고 있는 4대강사업 관련 논의를 보면 찬성측이 반대측에게 왜 그 사업이 타당성이 없는지를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가 4대강을 정비하려 한다는데 무슨 근거에서 훼방을 놓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그런 적반하장식의 우스꽝스러운 요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아무리 논의가 혼란스럽게 돌아간다 하더라도 공공사업의 타당성을 입증할 책임이 정부에 있다는 상식을 뒤엎으려 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수질 정화, 용수 확보, 홍수 방지에서 오는 편익이 22조원+알파를 초과한다는 확실한 증거를 우리에게 제시해야만 4대강사업이 타당성을 갖는다는 점을 인정받을 수 있다. (여기서 ?는 환경 파괴와 생태계 교란과 관련한 비용을 뜻하며, 이는 엄청나게 큰 값이 될 수 있다.) 그 토목공사에서 구체적으로 얼마만큼의 편익이 창출될 수 있는지를 밝히지 못하는 한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없다.

말이 쉽지 22조원이라면 이만저만 큰돈이 아니다. 최근 남유럽에서 방만한 재정운영으로 인한 경제위기가 빈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도 결코 안심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 이명박 정부가 참여정부로부터 건전한 재정을 물려받았기 망정이지, 부실한 재정을 물려받았다면 글로벌 금융위기의 파고를 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경제성이 입증되지도 않은 사업에 22조원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으면서 재정의 건전성을 말할 자격이 있을까? 다음 정부에게 부실한 재정을 물려주는 최초의 정부가 되기 않기를 바란다.

이 22조원이란 불요불급한 지출의 부담이 누구에게로 돌아갈지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더군다나 부자 감세를 통해 중, 저소득층의 조세부담을 상대적으로 더 높여 놓았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무상급식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연간 1조 남짓의 추가적 조세부담을 놓고 포퓰리즘이니 아니니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바 있다. 그런데 22조원이나 되는 엄청난 돈을 쓸모없이 쏟아 붓는 것과 관련한 조세부담 논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나는 그런 쓸모없는 조세부담을 단 한 푼이라도 떠안기 싫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 22조원의 비용이 전부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일단 공사가 완료된 후라 할지라도 매년 유지, 보수에 엄청난 비용이 들 것이 분명하다. 청계천처럼 작은 물길 하나를 유지, 보수하는 데 매년 백억원 가까운 비용이 들어간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전국의 강들에 매년 퍼부어야 할 돈은 가히 천문학적인 규모가 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수질 정화한 가지에 들어가는 비용만 해도 엄청난 규모일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흘러들어가는 물은 여전히 더러운데 물을 담는 그릇이 커진다고 물이 더 깨끗해질 리 없다. 오히려 물의 흐름이 늦어져 더 더러워질 가능성이 크다. 4대강사업으로 물이 맑아진다는 것은 엄청난 비용을 들여 정수를 하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 많은 양의 물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과연 얼마나 많은 돈을 퍼부어야 할지 상상해 보기 바란다.

22조원에 환경 파괴와 생태계 교란과 관련된 비용을 더하고, 여기에 다시 매년 들어가는 유지, 보수비용까지 포함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어간다는 결론이 나온다. 엄밀하게 계산해 보면 그 사업에서 나오는 편익이 그 1/10에도 못 미칠지 가능성이 크다. 나는 경제학자로서의 양심을 걸고 단언할 수 있다. 여러 정황에 미루어 판단해 볼 때 4대강사업은 경제적으로 전혀 가치가 없는 사업이라고 말이다. 정부가 좀 더 구체적인 수치로 나를 설득하지 못하는 한 나는 이 결론을 조금이라도 수정할 용의가 없다.

최근에는 4대강사업의 공정이 이미 30% 이상 진전되었기 때문에 사업을 계속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사이비 논리까지 등장하고 있다. 경제학의 기초만 갖고 있어도 이 논리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토목공사에 지금까지 쏟아 부은 돈은 무슨 수를 쓰든 회수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매몰비용(sunk cost)의 성격을 갖는다. 경제학원론 책을 보면 매몰비용은 얼마가 되었든 잊어버려야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설명이 나온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는 미련 없이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4대강사업의 계속 여부를 고려할 때 이제까지 얼마의 돈이 들어갔는지는 상관하지 말고 미래의 일만을 생각해야 한다. 즉 공사를 계속해 우리의 국토를 더 망치는 것이 바람직한지 아니면 여기서 그치는 것이 바람직한지만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30%의 공정을 보이고 있는 지금 이미 처참하게 망가졌지만, 더 이상의 파괴를 막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응당 잊어버려야 하는 매몰비용에 연연해 추가적인 파괴를 용인하는 것은 결코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없다.

이미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으니 공사를 계속하자는 사이비 논리는 비단 이번뿐 아니라 늘 등장하는 단골메뉴다. 새만금사업의 경우에도 이와 똑같은 논리가 등장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부와 토건족은 언제나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습성을 갖고 있다. 일단 저질러 놓고는 이 사이비 논리를 동원해 공사를 계속할 빌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나쁜 버릇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의미에서도 4대강사업과 관련해 그와 같은 사이비 논리가 발을 붙일 틈조차 주지 말아야 한다.

7. 맺음말

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경제학자로서의 모든 양심을 걸고 4대강사업에 반대하고 있다. 나는 그 사업이 수행할 가치도 없을 뿐 아니라, 수행해서는 안 될 것임을 자신 있게 증언할 수 있다. 지금 상황에서 그렇게 엄청난 돈을 쏟아 부으면서 4대강을 정비해야 할 당위를 전혀 찾을 수 없다. 정부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 강들이 심하게 오염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홍수와 물 부족의 위협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대규모 토목공사가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는 정부만 알고 있을 뿐 우리는 단 하나도 알지 못하고 있다.

4대강사업이 단지 아까운 세금이 낭비되는 결과를 빚는 데 그친다면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가장 우려하고 있는 것은 대규모의 환경 파괴와 생태계 교란이 가져올 파장이다. 현재 고작 30%의 공정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도 심각한 수준의 환경 파괴가 일어나고 있다. 공사가 완전히 끝났을 때 4대강 연변이 얼마나 끔찍한 모습으로 변화해 있을지는 상상하기조차 싫을 정도다. 그때가 되면 수천, 수만 년을 우리 곁에서 정겹게 굽이치며 흐르던 강은 우리와 영영 이별을 고해야 한다. 그 대신 인공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저수지들이 우리를 맞게 될 것이다.

전국의 강들을 청계천과 양재천처럼 만들겠다고 하는데, 이는 전국의 강을 성형수술대에 올리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할지 몰라도 속으로 골병이 든 생태계를 만들어낼 것이 너무나도 뻔하다. 이 강에서 살던 물고기를 저 강으로 옮기고, 이 강변에서 자라던 풀과 나무를 저 강변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전 국토의 생태계는 엉망으로 망가져 버릴 테니까 말이다. 그와 같은 인간의 무모한 간섭이 어떤 무서운 결과를 빚을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걱정이 크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순수한 동기에서 우러나온 국민의 걱정 소리에 귀를 닫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통령과 정부는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을 포기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수많은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강한 목소리로 '4대강사업 절대불가'를 외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임기 안에 끝내겠다는 고집으로 맞서는 상황이다. 국민이 어떤 말을 하던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나라를 이끌어가겠다는 독선과 오만이 두렵기만 하다.

지금 4대강사업을 둘러싼 국론분열의 양상은 심각한 위기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보수 언론이 이 진실을 잠시 은폐할 수 있을지 몰라도, 국민의 눈과 귀를 언제까지나 가려둔 상태로 묶어놓을 수는 없다. 나는 이 위기상황의 진전 과정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주시하고 있다. 최악의 경우 정부와 반대진영 사이에서 힘의 대결이 빚어질 수 있고, 어쩌면 2008년의 촛불시위 때보다 한층 더 심각한 사회적 갈등의 양상이 나타날 수 있다.

나는 정부에게 4대강사업에 반대하는 학자들과 종교인들이 발표하는 성명서를 정독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이 사업을 저지하려는 이들의 결의가 얼마나 굳건한 것인지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회유와 위협에 넘어갈 사람인지의 여부도 미리 파악하고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4대강 사업 결사반대의 의지를 이미 굳혀놓은 상태이며, 어떤 회유나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만약 이 사실을 잘 안다면 반대여론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지금과 180도 달라져야 한다. 지금처럼 약이라도 올리듯 속도전으로 대응하는 전략은 반대진영의 결의를 더욱 굳게 만드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상황은 낙관적인 전망을 내리기 어려운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결정적인 반전이 없는 한 이명박 정부가 4대강사업의 삽질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업에 반대하고 있는 지식인과 종교인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다. 파국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4대강사업의 삽질을 잠시 멈추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뿐이다. 어차피 4대강사업은 계속할 테지만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식의 거짓 대화 제의는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이 사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끝내 설득할 수 없다면 공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는 각오로 대화에 임해야 한다. 사실 민주주의의 원칙이 제대로 지켜진다면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계속 반대할 의사를 갖고 있다면 미련 없이 포기해야 하는 것이 순리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으로 뽑혔다 해서, 국회의 절대다수 의석을 확보했다 해서 모든 일을 자기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백지수표를 건네받은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 동안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발전을 거듭해 왔다. 이제는 세계 어느 나라도 부럽지 않을 만큼 성숙한 단계에 들어섰다고 자부해도 좋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으로 인해 민주주의적 원칙은 중대한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4대강사업을 둘러싼 국론분열의 상황이 어떤 방식으로 정리되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앞날이 결정될 것이다. 국민의 여론을 무시하고 4대강사업을 그대로 밀어 붙인다면 이 땅의 민주주의는 회복이 어려운 상처를 입게 된다. 나는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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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U@THETOP